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창립자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함세웅(70) 신부가 26일 현역에서 은퇴한다. 서울 중구 신당6동 청구동 성당에서 이날 본당신부로는 마지막 미사를 지낸 후 상도동 아파트에서 '원로사목자'로 두번째 삶을 시작한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진보적 신학연구기관인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고문피해자를 돕고 의학의 인권측면을 생각하는 인권의학연구소의 이사장이고 민주주의전당건립추진위원회와 10.26재평가와 김재규장군명예회복 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이며 시민사회 원로원탁회의 일원으로 어쩌면 퇴임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게 될 그를 만나 한국현대사와 함께 한 사제생활 44년을 들었다.
_건강은 좋으시지요?
"술도 담배도 안하니까. 옛날에는 포도주 몇 잔은 마셨는데 몇 년전부터 몸이 안 받아서 안해요. 담배는 박정희 덕에 감옥 가서 끊었지. 거기서도 교도관들이 몰래 주긴 줘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받아 피울 수는 없잖아. 그게 박정희가 날 유일하게 도와준 거야.(웃음)"
_감옥은 박정희 정권 때만 두번을 갔지요?
"76년 명동성당에서 3.1절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면서 끌려가서 이듬해 12월에 나왔는데 형집행정지잖아요. 그러니까 언제든 재판없이 끌어갈 수 있는 거야. 79년 오원춘 사건이 나서 전국을 강연하고 다니니까 나하고 문정현(신부)은 다시 끌어갔어요. 그래서 부마항쟁도 몰랐고 10.26도 감옥에서 맞았지요. 사실 첫 구속이 하느님 은총인 거야. 천주교 신부 목사들 교수들 여성들 정치인들 이렇게 한꺼번에 다 구속되기는 처음이거든요. 토요일이면 특별재판이 열려서 대한문에서 정동 법원까지 가는데 길에 차도 하나 없어. 완전히 통제를 하고. 국제적인 사건이 되고 전세계에 박정희 정권의 문제를 알리는 기회가 됐어요. 재판정에서는 김대중씨가 하루 종일 발언하는 날도 있어요. 민주주의가 뭐냐, 유신헌법이 뭐냐 그러면 하고 싶은대로 다 말을 하게 판사들이 두는 거에요. 나도 그때 세상 돌아가는 걸 많이 배웠어요."
_감옥 생활은 견딜만했습니까?
"감옥 가면 여기가 신학교다 하고 기도하는 일정을 짜요. 그러면 마음이 아주 맑아지고 편안해져. 면회오면 흐트러지니까 그게 오히려 싫을 정도였어요. 해방신학의 원리가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을 녹여내라, 받아들여라 거든요. 김지하 양심선언 때문에 집필이 금지됐다는 게 유일한 불편이었어요. 내가 감옥에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어요. 처음 구치소에 간 다음날 새벽에 교도관이 물 한 통을 주면서 청소를 하래요. 이틀밤을 샜으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쓰러져 자느라 몰랐는데 여기가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내가 육군사병으로 입대를 해서 육군교도소 헌병으로 차출되어서 교도소는 좀 알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더러운 데는 없어. 3월인데 화장실 똥도 안 내려가고. 두 세시간을 열심히 청소했어. 그랬더니 좀있다 옮기래, 땀흘리며 청소한 게 억울하잖아. 그래서 안 옮긴다 그랬더니 교도소에 내방이 어딨냐고 무조건 옮기라고. 그런데 바꾼 방은 너무 깨끗한거야. 구석에는 성탄카드가 하나 붙어있어서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 성인 천사들하고 있잖아. 거기를 성당이고 제단 삼아 기도를 했어요. 그 때 통장도 없어서 수녀님들이 영치금 넣을 돈이 없어 당황할 시절인데도 청소한 방 하나 뺐기기 싫다는 게 얼마나 웃겨요. 사람의 소유에 대해서 묵상을 많이 했어요. 대법원 확정판결 받고 광주교도소로 갔어요. 여기 재소자는 비전향 장기수나 간첩이 많았어. 고문 받다 팔 다리가 다 잘린 사람도 있고 겨울에 포승줄로 묶고 물 뿌리고 때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분도 있다고 해요. 나는 화려한 죄수잖아. 밖에서 기도해주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데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게, 내가 그 이념은 동조하지 않지만 그런 부분은 존경스러웠어요."
_사실 천주교회에서 로마로 유학을 보내는 것은 교수로, 고위성직자로 키운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왜 바뀌었어요?
"우르바노신학대학에서 교부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74년부터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어요. 74년 5월에 긴급조치 나고 수유리 한신대학은 데모로 폐교汰奐沮?갔어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축제 준비를 하길래 내가 그랬어요. 내가 여길 나오고 신부가 됐지만 너희들하고 강의를 하고 공부하는 게 부끄럽다. 그래서 걔들이 시위를 하게 됐지요. 7월에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동료신부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들었고요. 이것 때문에 당시 신학대학이 문교부에 교수 서류신청을 안해줬어요. 그까짓 것 안 해줘도 상관없다고 강의만 했지요. 바티칸 구조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교회공동체인가 하는 신학적 회의가 있었어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엘살바도르에 갔을 때 독재에 저항해서 순교한 로메로 대주교 무덤에 안 갔어요. 그 정부가 싫어하니까. 그래서 제가 바티칸에 그래요. 우리더러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너희가 정치적인 집단 아니냐. 우리는 예수님 정신으로 정의를 외치는데 바티칸은 정치를 하면서 우리더러 정치하지 말라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사제로서 산 것에 긍지나 보람을 느껴요."
_사제생활을 돌아보면 역시 가장 잘한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든 것인가요?
"당시는 단순한 시대였잖아요. 박정희가 불의하고 악인이라는 것은 온 시대가 모두가 다 공감하던 거잖아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못할 때 사제로서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인데 의미있는 행동을 한 게 됐어요. 87년 이후에는 시대가 다양화하면서 시민단체가 형성되고 우리의 역할이나 발언이 작아지게 됐는데 그거는 시대가 진전된 표지이니까 아름다운 거지요. 요즘은 오히려 '금송아지'를 받드는 시대라 어려워요. 탈출기 32장을 보면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집트에서 노예상태를 탈출한 사람들이 모세가 40일 동안 안 보인다고 형 아론과 누나 미리엄 등이 협력을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느님이라고 숭배를 해요. 지금 우리도 똑같잖아요.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고서도 다시 물신을 숭배해서 이명박을 찍었단 말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비판했을 때 보면 대통령부터 법관 검찰 언론까지 삼성의 돈을 안 먹은 데가 없어요. 종교인들은 부스러기라도 주워먹고 살았고요. 그러니까 삼성을 고발하고 정화했던 우리들, 전종훈 신부를 안식년을 주면서 활동을 못하게 했어요. 로버트 아돌프스라는 네덜란드 신학자도 일찍이 그런 교회를 비판했어요. 교회는 예수가 부활한 빈무덤이 되어야 하는데 속은 썩어들어가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이 아닐까. 로마의 황제제도를 그대로 베껴서 제의입고 높은 관 쓰고 그런 거 아니냐. 성경에도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믿을 수 없다, 그런데 나 자신을 포함, 우리 모두 맘몬을 믿고 있잖아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덤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구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는 구하지 않고 덤으로 나올 것을 먼저 구하니까 전쟁이 나고 싸움이 나는 거예요. 정의구현사제단은 앞으로도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는 일을 계속 할 거에요."
_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과는 개인적으로도 가까웠지요? 세 분을 평가한다면?
"73년에 로마에서 와서 연희동 성당 보좌신부로 배치가 됐어요. 동교동이 연희동 성당 구역이거든요. 김대중씨가 그때 막 납치에서 돌아와 연금상태였지요. 주임신부가 봉성체(영성체를 하러 찾아가는 일)를 해주러 가라고 했는데 경찰이 막아서 하지도 못했어요. 연금 해제된 후 이규동(전두환 장인) 이규광 형제의 이모뻘이고 김대중씨의 전처의 이모가 되는 장글라라 수녀님이 제가 신학생 시절 용산성당 유치원 원장님이라 저한테 김대중씨를 만나러 가자고 해서 처음 만났습니다. 3.1 민주구국선언으로 11명이 구속될 때 함께 구속되어서 제가 성경 한권만 들고 구치소로 갔을 때 그 분한테 5,000원을 꿔서 칫솔을 샀어요. 그 분은 제 성경을 달라고 해서 드렸어요. 참 유식하고 유머감각도 있고 남북관계에 진전을 이룬 것은 훌륭한 업적인데 영남을 품어안지 못한 것, 김종필에게 경제정책을 맡겨 금권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일이나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약속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어요. 정치자금을 준 김중권씨를 비서실장으로 앉힌 부분도 납득하기 힘들고요. 김영삼씨는 신민당 총재하던 74년 겨울부터 75년 봄까지 내가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을 했잖아요. 그런데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요. 그때도 경찰에 잡혀간다 귀띔이 있는 행사에는 절대로 안 나타나요. 특히 김영삼씨는. 결국 삼당합당해서 민주주의를 완전히 뭉개버렸잖아요. 제가 79년 12월에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돈명 변호사 요청으로 김재규씨 구명활동을 하고 다녔어요. 김대중 김영삼씨가 김재규씨 구명청원서에 서명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박정희 암살이 없었으면 민주주의가 더 빨리 이뤄졌을 거라 이런 말이나 하고. 그때 이희호 여사만 서명을 했어? 심지어 당시 김영삼씨는 '내가, 신민당이 민주주의를 이뤄내겠습니다' 하는데 진짜로 해야 할 말은 '정치인들이 제대로 못해서 박정희 독재에 희생된 학생 시민 성직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아닌가요? 김재규씨 재판기록에도 나오지만 박정희가 부마항쟁 나는 것을 보고 그랬다고 해요. 100만이든 20만이든 죽이면 된다, 캄보디아 봐라. 그래서 김재규씨가 이래서는 안된다 생각해서 박정희를 쏜 것이기 때문에 10.26은 유신을 끝낸 민주혁명이거든요. 그때 김재규 장군을 구했으면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정권을 잡겠다는 생각만 하고 진짜 필요한 역할은 하지 않았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송기인 신부가 소개해줘서 만나게 되었어요. 이 분이 민주주의를 향한 결기는 알겠지만 당도 배제한 채 청와대나 부산 젊은이들 중심의 정치를 하려 한 점, 대북특검을 해서 전 정권과의 균열을 가져온 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대북특검은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한 40명 중에 안동교구장인 유강하 신부님을 빼고는 다 반대를 했는데 결국은 강행을 해요. 다른 사람 말은 안 듣는 거지요. 임기말에도 제가 만나서 다음 정권을 잡기 위해 좀더 힘을 써주셔야겠다니까 '민주주의 시스템을 완전히 해놔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민주주의는 잘 정착이 될 거'라는 거에요. 이런 오만과 착각, 한미FTA나 평택 미군기지, 제주 해군기지 문제도 결국은 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일 아닙니까. 김재규씨를 민주화 유공자로 올리려 했지만 청와대에서 반대해서 이뤄지지 않았어요."
_한국사회에 지금 시급한 일은 뭐라고 보십니까?
"가치관 정립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까이는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결국 박정희 같은 친일자가 대통령이 되고 박근혜까지 이어오고 있잖아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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