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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더위를 식혀 주던 높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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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더위를 식혀 주던 높은 계단

입력
2012.08.3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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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서울 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경국사 건너편에 사람 잘 다니지 않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어렸을 적에 나는 이 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200여 개에 이르는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이, 어린이가 다니기엔 너무나도 힘든 길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일이 있지 않는 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나도 그랬지만 이 계단 길로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 친구 하나가 이 계단 꼭대기에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친구는 수업을 마치고 늘 이 길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하는 그 길을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그 길을 매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다. 그 친구가 자기네 집에 놀러오라고 말을 걸어 올까봐 조금은 의도적으로 그 녀석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해 다니는 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친구가 별로 없었던 그 녀석은 같은 반이었던 나를 몰래 점찍어 두고 있었나보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 금요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녀석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자기 집에서 놀자는 거다. 어렸을 때 노는 것만큼 중요한 일과가 어디 있었겠냐마는, 그 날은 놀자는 건 쥐똥만큼도 신경이 안 쓰이고 골고다 같은 계단만 눈에 그려졌다. 딱히 변명 거리도 없던 나는 끌려가다 시피 계단 앞에 섰다. 계단을 한 20여 개 즈음 올랐을까. 예상했던 대로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그러자 같이 가던 그 녀석이 먼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는 뜻이다. 이곳은 애초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계단이라 어린 애들한테는 계단 폭이 너무 넓다. 앉아서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아직도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기서 잘 못 굴렀다가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못 만져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한참을 찡그린 얼굴로 앉아있는데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쉬는 동안 자기가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다는 거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네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손가락만 까닥거려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때 녀석이 해준 이야기는 '곤충들의 친구 파브르'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파브르가 누군지도 몰랐다. 조금 듣고 있으니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다. 학교에서는 친구도 없이 과묵한 놈 인줄만 알았는데,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재주꾼도 이런 재주꾼이 없다. 파브르라는 외국인이 한 손에는 돋보기를 들고 잔뜩 허리를 굽힌 채 곤충들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때 들었던 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굉장히 긴 얘기였던 것 같은데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땀도 모두 말라 있었다.

잠시 후, 일어나서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도 얼마 올라가지 못해서 완전히 지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 녀석은 아까처럼 계단에 걸터앉더니 이번엔 '헬렌 켈러' 이야기를 유창하게 들려줬다. 그 다음 번 쉬는 계단 에서는 '퀴리부인'이었던 것 같다. 계단을 다 올라가는 동안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었는데 지금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힘들었지만 녀석의 이야기 덕분에 숨차지 않게 다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왜 계단의 시작 부분에서 그렇게 겁이 났는지 모르겠다. 계단이 높고 가파르지만 천천히 올라가면 숨차지 않는 것을. 쉬엄쉬엄 오르며 재밌는 이야기도 들으니 애초에 두려웠던 이 길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계단의 꼭대기에서는 온 동네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날 동네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건 누구네 집이다, 저건 우리 집이다 하면서 한참동안 집 찾기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날 이후 몇 번 더 계단 꼭대기에 있는 집에 놀러갔다. 계단을 오를 때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그 친구가 좋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계단은 없어졌다. 몇 해 전 갔더니 계단 꼭대기에 있던 동네는 재개발에 밀려 사람들은 다 떠났고, 무너진 담 벽만 외롭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천천히 써 내렸다. 그 다음에 갔을 땐 거기에 깔끔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보따리 친구 녀석을 모를 것이다. 아파트단지엔 더운 바람이 분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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