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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펴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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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펴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

입력
2012.09.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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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은 그를 일러 "사람 자체가 문화유산이고 문화재다. 그가 오는 곳에선 바람도 그냥 바람이 아니라 문화의 향기를 가득 싣고 온다"고 했다. 소설가 고 박완서는 "한때 그의 신도였던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비 발행)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63)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얘기다. 무심히 보아온 우리 문화재들에 새 숨결을 불어넣어준 <답사기> 는 1993년 1권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지난해 펴낸 6권 '인생도처유상수'까지 합쳐 올 봄 판매 300만부를 돌파했다. 인문서로는 전례 없는 일이다. 문화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번에는 바다 건너 제주로 향했다.

13일 발간된 7권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은 전편들과 달리 오롯이 제주 이야기로 꾸몄다. 유 교수는 문화유산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 민속, 언어 등을 모두 아우른 책의 성격을 '제주학 안내서'란 말로 압축하면서, 그 앞에 '제주허씨'을 위한, 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렌터카 번호판은 '허'자 돌림이잖아요. 요즘은 앞에 숫자가 붙지만 예전에는 '제주 허'였죠. 올레길이 제주 자연의 속살을 보여줬다면, 이 책은 렌터카 여행객들을 제주 문화 속으로 깊숙이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번에 통일신라와 고려를 다룬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 (눌와)도 펴냈는데, 전체 600쪽 가운데 400쪽을 고려에 할애해 "일그러진 고려 문화의 복권"을 시도한다. "내년 말이면 정년인데, <답사기> 10권, <미술사 강의> 4권을 완간하고 나면 소설이나 시집 말곤 책을 싹 치워버리고 '원고 빚'없이 사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왜 제주학인가.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가졌던 탐라국이 한국사에 편입된 것은 고려 숙종 10년(1105) 때다. 고려가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굴복한 뒤에도 자주권을 인정받았지만,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는 근 100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원의 멸망 이후 제주에 있던 몽골인 목호들의 반란과 최영 장군의 진압 등 곡절을 거쳐 조선 태조 2년(1393) 중앙에서 제주목사를 파견하면서 제주는 비로소 한반도의 확실한 일원이 됐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인들은 탐라 시절부터 전해진 신앙을 끌어안고 삶을 이어왔다. 그런 역사와 신앙을 모르면 제주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답사기가 겉핥기가 되지 않으려면 '제주학'이라는 융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게 내 힘만으론 될 일이 아닌데, 제주의 벗들을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 도움을 받았다. 공동저작인 셈이다.

-'제주답사 일번지'를 와흘 본향당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신앙은 제주인들의 삶 그 자체다. 마을마다 있는 신당을 뜻하는 본향당(本鄕堂)은 책에 소개한 김순이 시인의 말처럼 제주사람들, 특히 여인네들에게 '영혼의 동사무소' 같은 곳이다. 여기서 할망(귀신)과 독대하며 아이 낳았다, 누가 죽었다, 돈 벌었다, 망했다, 남편이 바람났다, 이런 모든 일들을 고해바친다. 카운슬링비는 초 한 자루나 술 한 병, 과일 몇 알도 좋고, 좀 있는 사람은 할망이 옷 해 입을 천을 끊어가거나 옷을 지어 간다. 이런 풍습이 제주식 '노블리스 오블리주'랄까, 능력껏 보시하는 기부 문화로 정착돼 재일동포나 외지에 나가 성공한 이들은 고향을 찾아 어떻게든 희사를 한다.

소지, 즉 하얀 한지를 가슴에 품고 소원을 빌고 나서 신목에 걸어두는 풍습은 글 모르는 여인네들을 배려한 것인데,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한 가지만 꼽으라면, 하얀 소망들이 신목에 걸려 나부끼는 이 장면을 들겠다. 하와이에 가면 꽃목걸이 걸어주듯이 제주에 온 관광객들에게 소지 한묶음씩 나눠주고 가슴에 품고 있다 신당에 걸게 하면 좋지 않을까. 이밖에도 이사나 집수리를 1만8,000에 달하는 귀신들이 하늘에서 전체회의를 연다는 신구간(新舊間,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에 맞춰 하는 풍습도 있다. 제주는 그야말로 민속문화 컨텐츠의 보고(寶庫)다.

-핏빛 역사 4ㆍ3을 비중있게 다뤄 인상적이다.

제주를 답사하자면 어딜 가도 4ㆍ3을 피할 수 없다. 희생자, 목격자의 가족이 남아있어 지나간 역사일 수가 없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를 벌여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아직도 '빨갱이 토벌'이었다고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격을 높인다고 민주항쟁으로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4ㆍ3은 350명의 남로당 무장대 토벌을 내세워 민간인 3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 데서 시작됐고, 희생자들이 무슨 항쟁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다. 자꾸 항쟁, 항쟁 하면 반발만 부르고 국민적 공감대를 넓히기도 어렵다.

-화가 강요배의 그림을 통해 제주의 자연에 매료됐다고 썼는데, 그 매력의 요체가 뭔가.

제주는 온대와 난대가 교차하면서도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엔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난대라니, 그래서 외국인들이 열광한다. 한라산도 높지만 가파르지 않아 윗세오름까지는 쉽게 오를 수 있고, 늘푸른나무들이 있어 차 타고 가며 보기만 해도 즐겁다. 제주가 우리 땅이 아니었다면 한반도가 얼마나 쓸쓸했겠나. 위치도 딱 좋다. 거제도처럼 육지에 붙어있었으면 친숙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없었을 테고, 더 아래였다면 중국하고 일본이 서로 지네 땅이라고 우겨 골치였을 거다. 제주는 자연이 한반도에 내린 축복이다. 제주의 매력에 빠지면 다들 죽기 살기로 좋아하는 '사생 팬'이 되지 않을 수 없다.(웃음)

-가장 아름다운 곳 하나만 꼽는다면.

무조건 한라산의 영실이다. 해발 1,700m 윗세오름까지 가는 길은 어리목과 영실 코스 두 가지다. 답사든 등산이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게 원칙인데, 나이 들면서는 영실로 오르내린다. 오를 땐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려오는 길엔 구상나무숲 아래로 바다가 펼쳐지는 게 정말 장관이다.(영실 편엔 '구라' 하면 빠지지 않는 그의 입담이 한껏 발휘된 '팔도 아줌마론'이 나온다. 동료 교수가 하도 웃겨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자연 얘기가 나왔으니,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논란을 짚지 않을 수 없다.

해법을 찾기 힘든 난제다. 원상복구도 어려운 단계다. 한미FTA나 강정 해군기지나 다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건데 그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이제 와서 잘잘못 따지는 건 의미가 없고, 결말을 잘 짓기 위해 뜻을 모아가야 하지 않나 싶다. 책에는 제주에 함부로 손 대지 말라는 경고의 뜻을 담아 '제주는 더 이상 인간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짧게 언급했다.

-한라산 산천단을 지은 청백리 제주목사 이약동을 '제주를 진실로 사랑한,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육지인'이라고 썼다. 그 사랑의 깊이에서 당신은 몇 번째쯤 되나.

답사하고 강연 다니느라 제주에 100번 넘게 갔다. 하지만 일찍이 제주학을 부르짖은 나비박사 석주명, 한라산의 높이를 최초로 측정한 독일인 겐테, 1930년대 경성제대 학생 시절 한라산 조난사고로 친구를 잃은 뒤 전공을 인류학을 바꿔 명저 <제주도> 를 써낸 이즈미 세이이찌 등 제주연구의 선구자들을 비롯해 제주가 좋아 아예 둥지를 옮긴 예술인들까지 나보다 상수(上手)들이 즐비하다. 한 101번째쯤 될까.

-<답사기> 후속편 계획은.

충북과 경기를 그동안 한 곳도 다루지 못했는데, 나중에 몰매 안 맞으려면 꼭 써야 한다.(웃음) 섬 이야기도 다룰 건데 하이라이트는 독도가 될 테고, 보길도, 증도, 청산도도 넣어야 한다. 일본과 중국 속의 한국문화도 쓸 생각이다.

-<답사기> 에서도 고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는데.

자칭 고려왕조 '사생 팬'이다. 같은 시기 중국에선 5개 왕조가 자리바꿈했는데, 고려왕조는 475년이나 갔다. 그만큼 튼실했다는 얘기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침입을 나열식으로 강조하다 보니 이미지가 일그러졌는데 고려의 실리외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현재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신라는 중앙귀족, 조선은 사대부라는 확실한 문화담당계층이 있었지만, 고려는 지방호족에서 문신, 무신, 권문세족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전자의 중앙문화와 수평비교해 뒤떨어졌다고 하면 안 된다. 또 고려는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였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2명이 중국인이었고, 장관급 이상 외국인이 26명이나 됐다. 외래 성 200개도 다 그때 들어왔다. 지금은 어떤가. 참여정부 시절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가 상공장관 물망에 올랐으나 외국인이라고 안됐고,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명창 박동진의 제자인데 외국 국적자란 이유로 이수자 자격을 못 줬다. 개방으로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 고려를 배워야 한다.

-<답사기> 1권이 나온 지 내년이면 20년이다. 문화유산 하면 당연히 '우리'를 떠올리는데, 그 시절에 '나의'란 수식어를 단 것이 대단히 파격적이다.

멋있게 들리는 제목 덕을 많이 봤는데, 그게 바로 나의 문학적 센스다.(웃음) 우리, 하면 민족적인 걸 강요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원래 91년 월간 '사회평론'에 연재한 글인데, 백낙청 선생이 첫 회 보고는 연재 끝나면 책 내자고 제안했다. 친구이자 내가 멘토로 꼽는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고인이 된 최재현(전 서강대 교수) 등이 진보지 만든다고 물정 모르고 설치길래 뜯어 말리다가 덜컥 편집위원을 맡고, 원고료 줄 돈 없으니 '너 심심하면 설 푸는 답사 얘기나 써봐라' 해서 시작했다. 그런데 딱 10회 쓰고 망했다.(웃음) 답사기의 밑거름이 된 게 84년부터 꾸준히 열었던 한국미술사 공개강좌인데, 인기가 대단했다. 94년 학전 소극장에서 이 강좌로 번 돈이 뮤지컬 '지하철1호선' 제작 종잣돈이 됐다고 (김)민기가 두고두고 고마워한다. 학전 주최로 10월 24일부터 12회에 걸쳐 '마지막' 강좌를 열고, 마침표를 쾅 찍으려 한다.

-말과 글에 다 재주 있기는 드문 일인데, 집안 내력인가.

전혀. 별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력갱생한 경우다.(웃음) 글은 자고로 중후해야 한다고 믿던 시절, 대담하게 입말을 옮긴 구라체가 먹힌 거다. 시인 이시영이 '간결체도, 화려체도 아닌 수다체다'고 했는데, 딱 정답이다. 조곤조곤 하면서도 사회비평 같은 뼈 있는 얘기도 하고 인생의 깊이가 녹아있는 유머도 던지고…. 오가며 듣는 얘기를 꼭 쥐고 있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풀어낸다. 그래서 어떤 이는 '유홍준은 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얘기를 잘 듣는다'고 평했다.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 미술잡지 기자 할 때 너무 난해한 평론가들 글 보면서 절대 이렇게는 쓰지 말자 다짐했던 것, 한국일보 '지평선', 조선일보 '만물상'같은 프로 저널리스트들이 쓴 주옥 같은 글들을 애독한 게 도움이 됐다. 또 옛 문장지에 담긴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의 명징한 글들을 이 몽블랑 만년필로 베껴 써보면서 많이 배웠다. 10년 전까진 원고지에 이 만년필로 글을 썼는데, 그게 50년쯤 지나면 돈 된다고 가져간 사람들도 있다.(웃음)

-문화재청장 시절 구설에 많이 올랐고, 결국 숭례문 화재로 옷을 벗었다.

참여정부와 언론의 불편한 관계 탓에 과도하게 씹혔다. 사실 숭례문 관리 책임은 중구청에 있고 방화범의 소행이었고 당시 나는 해외출장 중이었는데, '국보 태워먹은 놈'이란 욕도 먹었다. 도의적 책임은 죽을 때까지 내가 지고 가야 할 몫이지만, 그런 악의적 비난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천안함은 국방장관이 부숴먹은 거냐고 되묻고 싶다. 숭례문 복원 후 관리책임을 놓고도 말이 많은데, 이제 기회에 문화재청에 지청을 만들어 절집 소유가 아닌 국보, 보물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글이나 쓰고 살 걸 괜히 공직에 나갔다 후회할 법한데.

무탈하게 연륜 쌓아가는 길이 있는 걸 왜 몰랐겠나. 하지만 관행에 젖은 문화재 행정을 바꾸고 싶었고, 실제로 신나게 바꿨다. 문화재청 정원이 650명에서 850명으로, 예산도 2,500억원에서 4,500억원으로 늘었고, 위상도 높아졌다. 개인적으로도 문화재를 더 깊고 넓게 보는 안목을 키웠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답사기> 6,7권은 나올 수 없었다.

안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사회는 무슨 라인을 왜 그렇게 강요할까. 인간 사고의 좌우란 게 영역을 말하는 거지 딱 선 위에 놓인 게 아니잖나. 인간은 12가지의 얼굴이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진보면서 여성 문제에선 되게 보수적인 사람도 많다. 정치적으론 진보를 표방하면서 민중미술을 폄하하고 꽃이나 예쁜 여자 그림만 예술로 아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다. '진보적 인사들의 비진보적 예술관' 이런 글 한번 써보고 싶다.(웃음)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처럼 국민의 재산인 문화재 갖고 떼돈을 벌고도 문화유산 지키는 데 돈 한 푼 안 썼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더라.

내 알아서 멋있게 쓸 테니 염려 말라고 해라. 돈을 좀 벌긴 벌었지만, 인세는 책값의 10%인데, 거기 붙는 세금은 35%로 고율이라 떼돈까진 아니다. 베스트셀러 한번 내면 그 해 번 돈에 대한 세금을 다음해에 내야 하고 최소한 그 돈만큼의 수입은 있다고 보고 그 다음해에 또 세금이 붙는 식으로 굴러가 관리 잘 못하면 술술 다 나간다. 내가 여기저기 걸친 데가 많아서 '준조세' 부담도 엄청나다.(웃음) 문화재 하나 보수하는 데만도 몇 십억이 드는데, 내가 돈 몇 푼 넣어 될 일도 아니다.

-대선 앞두고 여기저기서 많이 부르지 않나.

얼마 전 손학규 민주통합당 경선 후보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다. 학규 형은 나 같은 천진한 미학도를 운동권으로 꼬셔 버려놓은 사람이다.(웃음) 문재인 후보와도 가까워 4ㆍ11 총선 때 부산 내려가서 지원유세도 했다. 아까 출간기념 간담회 끝나고 나오다 안철수씨와 가깝다고 알려진 모 의원을 만났는데, 힘 좀 실어달라고 하더라. 내가 정치에 욕심 있었으면 국회의원 될 기회가 좀 많았겠나. 그럴 생각 전혀 없으니 지금 당장 어디 캠프에 발 들일 일 없고, 선수가 결정된 뒤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유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시리즈 완간하면 정말 펜을 완전히 놓는 건가. 유홍준교 신도들, 난리 날 텐데.

농담이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이 많은 사람이 나와 지금 시대에 맞지도 않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세상 걱정하는 걸 보면서 노추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몇 세 이상 매스컴출연금지법이라도 만들고 싶다.(웃음) 어느 시점 되면 사회적, 정치적 발언은 딱 끊고, 고무신 신고 유적지에서 아이들한테 옛 이야기나 들려주고 그렇게 사는 게 바르게 늙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계획은 정년퇴임이 그 시점이었는데, <답사기> 랑 <미술사강의> 집필 마치려면 한 칠십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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