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으로 불린 전쟁영웅은 둘이다. 작전과 용병에 능한 군사지도자면 누구나 나폴레옹일 수 있지만, '붉은'이란 수식어가 연상시키는 공산권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영웅으로 초대 소련 육군 원수였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가 처음 이 별명을 얻었다. 스탈린과의 갈등을 겪고, 끝내 나치 협력 및 트로츠키 옹립 반란 모의 혐의로 44세에 목숨을 앗겨야 했던 불행한 전쟁 천재였다.
▲ 두 번째는 이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4일 102세로 눈을 감은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 구엔 지압은 죽는 날까지 국민적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누린 영예는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영웅인 호치민(胡志明)에 견주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일찌감치 프랑스 제국주의 반대 운동에 눈떴고, 마오쩌둥(毛澤東) 사상과 그 갈래인 호치민 노선에 심취했다.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적 없는 그는 대표적 비정규전인 게릴라전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베트남 북부 농촌지역을 거점으로 베트남독립연맹(越盟ㆍ월맹)의 군사조직 확충에 힘썼다. 그것이 2차 대전 직후 호치민이 선언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군사적 기초가 됐다. 그의 진가는 전승국인 프랑스가 옛 식민지를 되찾으러 돌아오면서 벌어진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드러났다. 압도적 장비로 무장한 프랑스군 1만2,000명에 궤멸적 타격을 주어 패퇴시킨 디엔비엔푸 전투는 전사(戰史)에 두툼하게 남았다.
▲ 호치민(옛 사이공)시 외곽의 관광 명소인 구치 땅굴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출입구나 연결통로는 베트남인 체격에도 비좁지만 그물처럼 연결된 총 연장 200㎞의 땅굴 곳곳에는 화생방 공격까지 피할 수 있는 대피시설은 물론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학교와 탁아소, 대장간 등까지 고루 갖추었다. 혀를 내두를 시설이었지만 장기간의 불안과 불편 속에서도 믿음을 간직하도록 대중을 이끈 지압 장군 등의 지도력이 더 놀랍다. 전쟁의 승패는 결국 인간에 달렸음을 역사에 각인하고 그는 갔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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