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에게 오피스 스파우즈(office spousㆍ사무실 배우자)라는 말은 생소하지 않다. 오피스 스파우즈는 실제 부부나 애인 관계는 아니지만 직장에서 이들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성 동료를 뜻한다. 아내 같은 여성 동료는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 남편 같은 남자 동료는 오피스 허즈번드(office husband)라고 한다.
지난달 한 결혼정보업체가 남녀 직장인 654명을 대상으로 오프스 스파우즈가 있는지 묻는 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직장인 10명 중 3명에게 오피스 스파우즈가 있었다. 미혼 직장인(24.2%)보다 기혼 직장인(40.2%)이, 타 부서보다 같은 부서(64.9%)에 근무하는 동료 사이에 많았다. 오피스 스파우즈 유무에 따라 시선은 갈렸다. 오피스 스파우즈가 있는 직장인은 '업무에 도움 되는 긍정적 관계'(48.5%)라고 답한 데 반해 오피스 스파우즈가 없는 직장인은 '나쁜 소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관계'(25.9%)라고 했다.
한국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은 약 열 시간 안팎.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수면시간 제외하고 약 다섯 시간 안팎)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장인들에게는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 불필요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토로할 동료가 절실하다. 왜 굳이 이성 동료일까. 오피스 스파우즈의 효용을 높이 사는 직장인들은 동성끼리는 견제 심리가 강하지만 이성 동료는 그렇지 않아 마음을 터놓고 조언과 의견을 구하거나 나아가 사적인 일상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료와 배우자 사이 관계
오피스 스파우즈는 실제 배우자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잦다. TV 시리즈와 영화로 공개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X파일'의 폭스 멀더(데이빗 듀코브니)와 대너 스컬리(질리언 앤더슨)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TV 시리즈에서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키스신 삽입 여부만으로도 팬들로부터 화제를 모을 정도로 미묘하다. 그러더니 영화에선 결국 선을 넘었다.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에서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남성 10명 중 7명과 여성 10명 중 3명이 오피스 스파우즈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동료일까, 잠재적 남녀관계일까. 오피스 와이프나 허즈번드가 있는 직장인은 알쏭달쏭한 오피스 스파우즈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모(남ㆍ40) 과장은 2년 전 같은 부서가 된 이모(여ㆍ33) 대리가 없는 직장 생활은 상상도 하기 싫다. 김 과장은 이 대리의 사수를 맡다 친해졌다. 이 대리는 업무 교육을 잘 따랐고 중간관리자의 어려움도 제 일처럼 이해했다. 김 과장은 다른 동료에겐 밝히지 못하는 어려움도 이 대리에게만은 말할 수 있다. 최근에는 부부 문제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김 과장은 "이 대리는 여자고 나는 남자지만 그건 생물학적인 차이다. 그래서 (이 대리를) 더 예의 있게 대하게 된다"며 "주변에서 우리 사이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소울 메이트를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서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모(42) 과장을 오피스 허즈번드로 둔 윤모(여ㆍ40) 과장. 윤 과장은 오피스 허즈번드가 업무 효율을 높여주고 힘든 병원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다. 윤 과장은 병원장을 험담하거나 다른 의사에 대해 뒷말을 해도 무조건 내 편이 돼 주는 이 과장에게 어느새 감정적으로 크게 의지하고 있다. 스킨십만 없을 뿐 성적 긴장감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남편의 오피스 와이프는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윤 과장은 "이 과장과 불륜 관계를 맺진 않겠지만 묘한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남편이 나처럼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오피스 와이프가 있을까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자신처럼 자제력이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오피스 허즈번드와 오피스 와이프가 불화로 인해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 조모(남ㆍ37) 과장의 오피스 스파우즈는 지난해 입사한 안모(여ㆍ28) 사원이었다. 이것저것 업무를 도와주다 관계가 발전했다. 조 과장은 나이 차이는 많지만 어른스러운 안 사원에게 금세 호감을 느꼈다. 둘은 친구처럼 사적 비밀을 나누는 과정을 거쳐 서로 심적으로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안 사원의 업무가 바뀌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안 사원은 조 과장에게 업무 불만을 늘어놨고 조 과장이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다며 서운해 했다. 급기야 조 과장은 안 사원이 다른 동료에게 자신의 비밀을 떠벌리고 흉까지 봤다는 걸 알게 됐다. 조 과장은 "신뢰가 깊고 누구보다도 친밀한 관계라고 믿었던 안 사원이 그럴 줄 몰랐다"며 "역시 직장에서 만난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고 행동을 달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조 과장은 "현재는 안 사원과 아는 체도 안 한? 사무실 아내라더니 마치 이혼한 전처 같다"고 자조했다.
배우자와 단절이 낳은 기현상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왜 오피스 스파우즈를 만드는 걸까. 미혼보다 기혼에게 오피스 스파우즈가 두 배가량 많다는 조사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오피스 스파우즈가 배우자와의 대화 단절이 파생시킨 기형적인 인간관계일 가능성을 높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회사 안에서 유사 배우자나 애인을 만드는 이들은 실제 배우자 및 애인과 의사소통에 문제를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들은 직장 문제를 집안에까지 끌어들이는 데 인색하다. 직장 문제는 직장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은근히 팽배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쌓이는 직장 스트레스가 실제 배우자 및 파트너와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악순환이 지속되면 속 시원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해지고 그러면 '남편보다 남편 같은 남성동료' '아내보다 아내 같은 여성동료'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현대인의 삶에서 일과 직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날수록 오피스 스파우즈 관계도 더 많아질 것이다. 오피스 스파우즈는 양날의 칼이다. 직장생활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남녀 관계가 업무적으로든 심적으로든 틀어지면 직장생활까지 망친다. 배우자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사무실 배우자와 갈등을 겪는다면 집도 직장도 지옥으로 변한다. 오피스 스파우즈와 적절한 선을 유지하려면, 혹은 오피스 스파우즈를 굳이 만들지 않아도 원만한 직장생활을 하려면 실제 배우자나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 "오늘 안색이 이상해. 어디 안 좋은 데 있어?" "요즘 너무 기운 없어 보여.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이 말에 기운을 얻을 사람은 사무실 배우자만이 아니다. 어쩌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진짜 남편과 아내가 절실하게 그리워했을 말일 수도 있다.
조옥희 기자 hermes@hankooki.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