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자연스레 늙어가는 '녹슨 집'… 공동체의 꿈도 무르익어 간다

입력
2014.05.13 16:08
0 0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한국 주택가에서 철은 흔히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콘크리트 속에 박혀 건물을 떠받치는 용도로는 자주 쓰이지만 집의 외관을 결정 지을 때는 으레 벽돌이나 목재에 밀려나게 마련이다. 가끔 양철 지붕 따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그 풍경 또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어, 시끄럽게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라든지 벌겋게 녹이 슬어 바람에 그렁대는 모습은 시인들의 글감으로는 사랑 받을지언정 주택 외장재로는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이 있다. 면적 59.85㎡(18평), 높이 11m로 좁고 길게 설계된 이 집은 불그스레하게 녹슨 철판 파사드 때문에 더욱 눈에 띈다. 건축사진작가 이인미 씨가 남편, 아들, 어머니와 함께 사는 ‘비온후 주택’은 출판사 비온후의 사무실이자 가족의 주거 공간, 그리고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사랑방이다.

오래된 주택가에 들어선 ‘녹슨 집’

이 씨 부부가 집을 짓기로 한 것은 3년 전이다. 남편이 운영하는 출판사 사무실 건물이 없어지고 비슷한 시기에 살던 아파트의 임대 기한이 만료되면서 부부는 사무실과 집을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처음부터 작은 집을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건축비에 들어갈 예산을 정해 놓고 나머지 돈으로 땅을 사려다 보니 토지 크기가 작아진 거죠.”

비온후주택이 자리잡은 곳은 구도심의 오래된 주택가다. 대학생 아들과 사무실 때문에 도시를 떠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부부는 온천천 인근 103㎡(31평) 크기의 땅을 1억2,000만원에 샀다. 해당 토지에 최대로 확보할 수 있는 건축면적은 59.85㎡(18평). 건물을 3층으로 올리면 연면적을 166.61㎡(50평)까지 확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넉넉지 않았다. 사무와 주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간 외에도 손님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확보돼야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 씨의 집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냉장고에 술 떨어질 날이 없는” 집이다. 부산 지역 예술인들의 모임 ‘보따리’의 안주인이기도 한 그는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에서 더 나가 공동체 형식의 주거를 꿈꿔왔다.

“대여섯 가구가 함께 집을 지어 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내 집을 짓는 목적도 개성이 강한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싶은 생각이 더 컸죠.”

그는 사무실 건물이 없어지기 전부터 친구들과 함께 집을 짓기 적당한 땅을 물색해왔다. 하지만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사 날짜가 임박하면서 부득이하게 이 씨 부부가 먼저 집을 짓게 됐다. 설계는 비온후풍경의 장지훈 대표가 맡았다. 이 씨의 대학 후배인 장 대표는 집 주인의 성향과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공간에 요구되는 프로그램이 워낙 다양했어요. 출판사 사무실과 주거공간, 커뮤니티 공간 외에도 이런저런 수납공간이 충분해야 했거든요.”

장 대표는 층별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구분했다. 1층은 출판사에 전부 할애하고 3층은 침실과 작은 거실로 꾸몄다. 2층은 공과 사가 혼재하는 구역이다. 한쪽엔 여남은 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긴 탁자를 놓고 다른 한쪽엔 부엌 겸 식당을 만들었다. 탁자가 놓인 쪽은 낮엔 이 씨의 작업실로, 저녁엔 가족이 모이는 거실로, 손님들이 올 때는 사랑방으로 변신한다.

건축가는 부엌과 작업실 사이에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방문객의 종류에 따라 공간의 성격도 달라지게 했다. 도어를 닫으면 부엌과 완전히 분리돼 업무 회의를 하기에 손색이 없고, 술친구들이 놀러 와 도어를 활짝 열면 대번에 흥청망청한 분위기로 바뀐다. 이곳은 보따리 멤버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 이사온 후 3년 동안 바깥에서 술자리를 가진 게 열 번도 채 안 될 정도다. 지금도 매주 두 차례 슬라이딩 도어의 문이 열리고 왁자한 자리가 벌어진다.

부족한 수납 공간은 3층에 다락방을 지어 해결했다. 출판사에서 나오는 재고 서적 외에도 남편이 수집하는 DVD와 음반, 이 씨가 사 모으는 팝업북(책장을 열면 그림이 튀어나오는 책)을 보관하려면 창고와 다용도실, 계단실로도 부족했다. 건축가는 사선제한 때문에 잘려나간 건물 윗부분을 대칭으로 해 박공지붕(책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을 만들고 그 아래 빈 공간을 다락방으로 조성했다.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다락방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다락방

가운데 거실을 기준으로 좌우에 다락방을 만들고 거실이 있는 쪽은 양쪽 다락을 연결하는 브리지만 남긴 채 위를 틔웠다. 덕분에 거실 높이는 다락 높이를 더한 4.8m가 돼 들어서는 순간 수직으로 탁 트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삼각 지붕의 형태와 그를 떠받치는 구조물이 그대로 노출된 것도 시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지붕에는 천창을 뚫어 햇살을 한껏 들였다. 건축가는 결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천창에 유리 대신 폴리카보네이트(플라스틱의 일종)를 썼는데 “아직까진 결로가 생긴 적이 없다”고 했다. 원래 수납을 위해 만든 다락이지만 삼각형의 아늑한 구조와 천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이 꽤 그럴싸해, 한쪽은 아들이 침실로 사용 중이다. 책을 비롯해 안 쓰는 물건들은 반대편 다락에 쌓았다.

집안 구석구석 공동체의 가능성

공동체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지은 집이지만 비온후주택에는 공동체의 가능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평소 집주인과 친하게 지내던 예술인들이 시공 작업에 조금씩 참여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장 대표도 그 중 한 명인 셈이다.

이 씨는 집을 설계할 때 “건축가가 지은 집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묘한 요구를 했다. 디자인 결정권을 온전히 양도하는 말이자 건축가의 자제력을 시험하는 말이기도 했다. 평소 장 대표의 건축관은 일부 건축가들의, 소위 작가주의와 반대편에 있다. 특히 주택 설계에 있어서는 “건축주가 살기 편한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건축물 본연의 목적과 성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디자인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그는 철이라는 소재를 택했다.

집 전면부에 사용된 코르텐강판은 흔히 산화철판이라고 불리는 소재다. 처음엔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이다가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턴 녹이 슬기 시작해 6개월이면 불그스레한 갈색 표면이 완성된다. 일반 철판은 녹이 고르게 슬지 않는 데 비해 전체적으로 곱게 산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3~5년이 지나면 산화가 끝나고, 이후 표면의 변화는 없다.

“건축 외장재 중에는 세라믹이나 알루미늄 복합패널처럼 완결성 있는 제품들이 있습니다. 이런 재료들은 시공하는 시점이 가장 완성도가 높고 그 후 점점 질이 떨어지죠. 반면 목재나 철, 돌 같은 소위 1차원적 재료들은 처음엔 다소 거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맛이 있습니다.”

철이 녹슬면서 내구성이 떨어지거나 비가 올 때 녹물이 흐르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장 대표는 “산화는 내구성 저하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다만 녹 가루가 빗물에 씻겨 내리며 다른 벽들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물받이를 장착한다”고 설명했다.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1층 출판사 사무실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의 한 골목에는 ‘녹슨 집’이라는 별명을 가진 3층짜리 주택 1층 출판사 사무실

비온후주택이 완공된 것이 2011년 11월이니 현재 산화는 거의 완료된 상태다. 표면에 형성된 치밀한 산화피막은 붉은 갈색에 말할 수 없는 깊이를 더하며 자못 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측면에는 가늘고 길게 재단한 나무를 이어 붙였는데 성당의 복도처럼 차분한 느낌이 암적색의 철판과 꽤 잘 어울린다. 촘촘한 나무 외벽은 1층과 2층의 내벽으로 이어지는데 빼곡히 쌓인 책과 좋은 조합을 이룬다.

파사드와 같은 소재로 만든 대문은 이 씨의 지인인 금속 조각가 박은생 씨가 만들었다. 건축가와 작가의 협업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함께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 씨의 제안을 장 대표가 흔쾌히 받아들이며 추진됐다. 결과물은 대만족이었다. 박 씨는 철판의 이음새를 조각보처럼 용접했는데 장 대표는 “시공업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세심함”이라며 감탄했다. 박은생 작가는 1층 사무실의 철제 계단과 2층 테이블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마당은 설치작가 백성준 씨와 공유하고 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백 씨 부부는 이 씨가 집을 지을 당시 바로 옆 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 양쪽 집안은 얼마 되지 않는 마당을 터서 공유하기로 하고 중앙에 공동으로 관리하는 작은 화단을 놓았다. 백 씨는 출판사 사무실에 설치한 전면 책장을 만들어줬다.

비온후주택이 자리잡은 이후 동네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백성준 작가의 집, 보따리 모임을 위한 공간, 김대홍 작가의 작업실이 차례로 들어서며 이웃으로 지내게 된 것이다. 이 씨가 꿈꿨던 공동체는 수안동의 한 골목에서 약간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실현되는 중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비온후주택 건축개요>

●대지위치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 대지면적 103㎡ ● 건물규모 3층 ● 건축면적 59.85㎡ ● 연면적 166.61㎡ ● 건폐율 59.89% ● 용적률 163.7% ● 최고높이 11m ● 구조재 철근 콘크리트+경량 목구조 ● 지붕재 칼라강판 ● 단열재 고밀도 글라스울 ● 창호재 PVC 시스템창호 ● 외장재 코르텐강판, 방부목(레드파인), 외단열미장마감공법 ● 내장재 수성페인트, 벽지 ● 설계자 디자인아뜰리에 비온후풍경 장지훈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