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참사가 일어나고 하루라도 참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대양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다. 훤하게 밝은 아침에 뻔히 눈이 보이는 연안에서 일어났다. 사고가 나자마자 신속하게 보도가 되었고 곧 전원 구조되었다는 속보도 나왔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능력은 된다고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연함은 곧 당혹함으로, 참담함으로 바뀌었다. 공권력에 의해 구조된 사람 실질적으로 0명. 더욱 비참한 것은 사고가 난 지 한 달이 다 됐지만 날이 갈수록 해결되는 문제보다 새로운 문제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어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시간이 갈수록 더 망가졌다. 모두가 다 탄식했다. “이게 나라냐!”
그러나 이 참담한 나날들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날은 5월 8일이었다. KBS의 보도국장이 죽은 이들을 교통사고와 비교하며 모독했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그 동안 울분을 참지 못하던 유가족들이 행동에 나섰다. 안산의 합동분향소에서 자식들의 영정을 떼어내 그 사진을 들고 KBS로 올라왔다. 따뜻하게 꼭 끌어안아도 시원치 않은 자식의 차가운 영정을 가슴에 품은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제는 제발 저 세상에서라도 편히 쉬기를 바라는 자식을 다시 이 지긋지긋한 세상으로 불러들이는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식의 죽음이 모독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 죽음이 소위 사회의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 죽음의 진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를 가진 언론인들에 의해 조롱 당하고 모독되었을 때 가만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인륜이자 천륜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신의 법, 친족의 법이라고 부른다. 이 도리를 다하기 위해 유가족들은 자식의 영정을 들고 거리로 참담하게 나와야만 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자의 도리를 다하고 죽은 자녀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다.
대신 유가족들은 그들의 존엄을 포기해야만 했다. 지붕 아래에서 조문 오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바닥에 앉았다. 나지막한 흐느낌과 서로를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죽은 이를 모독한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고 절규해야 했다. 청와대로 가는 길에서 유가족들은 무릎을 꿇고 경찰에게 빌어야 했다. 자신들은 지금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나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걸 풀어달라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구조할 수도 있었던 이들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것만 아니라 그 죽은 이들 뒤에 남겨진 가족들까지 이렇게 존엄이 짓밟히고 모독되었다.
KBS와 청와대 앞에 모인 이들의 절규와 외침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참담했다. 현장을 취재하던 지인인 기자는 사건 후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자기조차도 가족들이 영정을 하늘 높이 들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또 다른 기자 한 명은 자녀의 영정을 들고 있는 그 부모들의 고통을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사진을 찍을 때도 유가족의 앞쪽에서 찍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고 하지만 그 고통과 슬픔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일 때 사람은 차라리 그 얼굴을 비낄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을 대면하는 순간 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날 그 길거리에서 죽은 이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그 누구도 존엄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인간일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재난은 낱개로서의 개인과 체제가 아무런 매개 없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발생한다. 그날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이 그 누구에게도 매개되지 못한 유족들과 권력이 민낯으로 대면한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국가의 법과 친족의 법, ‘합리성’과 윤리가 충돌하였다. 친족의 법과 국가의 법, 윤리와 합리성이 충돌할 때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일 뿐이다. 하나는 국가의 법을 따르고 윤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의 죽음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이다. 몇몇 고상하신 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국가와 대통령을 문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차와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화가 나고 흥분한다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이 절차를 밟아서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국가를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에 개인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종속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미개한 것이다. 애도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늘 분별하고 싶어 하고 구분 지을 것을 요구한다. ‘순수’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유가족, ‘순수’한 애도와 불온한 애도로 말이다.
두 번째는 죽은 이에 대한 산 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국가의 법과 맞서는 것이다. 국가의 법은 강력한 철벽이다. 이 철벽을 향해 고함치고 절규한다고 해서 국가가 제대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국가의 법은 저 고상하신 분들처럼 ‘냉정해질 것’을 요구하고 절차를 따를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절규하더라도 들어주지 않는 철옹성 같은 국가의 법 앞에서 죽은 이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미치게 되거나 법을 어기게 된다. 윤리를 따르기 위해 국가에, 법에 맞서는 한 미친 사람이 되거나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가족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게 되면 그 다음에 유가족과 죽음을 모욕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조문을 갈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사회학자 바우만은 이렇게 윤리와 합리성이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릴 때 언제나 패배한 것은 인간이었다고 말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윤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미치거나 범법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국가의 법을 따르면 또 윤리를 저버린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반면 유가족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몰아가는 존재들, 개인과 권력을 충돌시킨 다음 선택 같지도 않은 선택을 강요하는 ‘문명인’들은 여기서 꽃놀이 패를 쥔 승리자들인 것처럼 보인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인간이 될 수 없는 패배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런 선택의 상황, 여기서 ‘악’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사회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악의 합리성’이자 ‘악의 사회성’이라는 것이다. ‘미개’의 반대편에 ‘문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존재하며 승리하는 것은 바로 이 ‘악’이다.
그러나 나는 8일 밤에서 9일 오후로 이어지는 그 길고도 참혹한 날, 역설적으로 인간의 승리를 봤다. 현장의 소식을 전해준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유가족들의 자제력은 거의 초인적이었다고 한다. KBS를 항의 방문했을 때 KBS 측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제력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극한으로 자극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가족들은 국가와 맨땅에서 맨몸으로 정면으로 충돌하였지만 그 충돌의 경계에 강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그 경계에서 충돌을 유지한 채 물러나지도, 돌파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버티고 있자 당황하며 추한 민낯을 드러낸 것은 저들이었다. 자식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 자신의 존엄을 포기했던 분들의 초인적인 힘에 의해 가까스로 존엄이 이길 수 있었다.
그 분들에게 경탄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존엄은 언제든지 다시 짓밟힐 수가 있고 그 조짐은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 존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제 그 날 밤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이 글의 시작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도 없고 안전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죽은 이와 산 이 모두가 모욕당하고 존엄이 짓밟히며 인간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재앙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은 안전과,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 세월호의 참사 이후에 이 땅에 다시 세워져야 하는 것은 사람이 패배하지 않는, 다시는 죽은 이와 산 이가 모욕당하지 않는 ‘존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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