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안경비대(USCG)는 ‘퍼스트 리스폰더‘(최초 대응자)로 불린다. 해난사고를 가장 빨리 접하고 또 제일 먼저 구조에 나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790년 창설 이래 최초 대응자로서 구해낸 생명은 110만명이 넘는다. 미 최대 재해로 기록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때는 3만3,545명을 구조했다. 당시 이런 능력을 높이 산 백악관은 관례를 깨고 현장 통솔 책임을 연방재난관리청(FEMA) 대신 해안경비대 부사령관에게 맡겼다. 그런 만큼 해안경비대에 대한 미 사회의 예우도 남다르다. 지난 3년간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졸업식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닛 나폴리타노 당시 국토안보부장관, 조 바이든 부통령이 차례로 참석했다. 오바마는 축사에서 해안경비대를 최초 대응자로 부른 뒤 “미국을 테러와 재해에서 구해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런 미 해안경비대를 한국 해양경찰과 견주기는 사실 어렵다. 해안경비대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와 함께 5대 군조직의 하나이고, 한국전에도 참전했다. 평시에는 국토안보부, 전시에는 해군 지휘를 받는다. 이들의 공권력 집행이 해경보다 훨씬 강력하고 인력, 장비도 비교하기 힘들만큼 잘 갖춰진 이유다. 4만이 넘는 병력과 항공기 200여대, 고속정 1,400여대, 경비함 250여대, 대형 함정 10여척 등은 한국 해군력에 못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해안경비대가 재난사고에 만능인 것은 아니다. 재난구조 및 수색은 해상안보, 자원보호, 범죄단속 등 해안경비대의 주요 임무 11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지나친 임무중복 탓에 재난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종종 받는다. 9ㆍ11테러 이후에는 지나치게 해상안보 문제에 치중, 부작용이 많았다. 2010년 멕시코만 원유 유출사고 때는 방제능력의 한계는 물론이고 유관기관 협조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해안경비대는 인명 구조와 수색에 대한 노하우와 매뉴얼만큼은 치밀하고 철저하다. 현실적 구조 목표치를 77%까지 끌어올린 구조수색(SAR)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0년대부터 도입된 SAR프로그램은 미 전역을 지역별로 나눠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30분 안에 출동하고 90분 안에 현장에 도착해 구조하는 체계를 갖추도록 했다. 또 미 해역을 드나드는 모든 대형 상선들에게 위치통보제도인 앰버(AMVER) 가입을 유도, 24시간 해난사고를 감시한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국가구조수색위원회(NSARC)를 수시로 열어 SAR프로그램 협력문제와 사고대처 매뉴얼을 재평가한다. 해안경비대와 함께 공군, 국립해양대기관리청(NOAA), 교통부, 내무부, 연방통신위원회(FCC) 국립항공우주국(NASA)이 참여한다.
해안경비대는 사고예방을 위해서라면 선박업계와도 손을 맞잡는다. 선박크기나 승객수로 볼 때 사고가 나면 대형일 수밖에 없는 크루즈선에 대해선 해외국가, 선사와 공동으로 매년 구조훈련인 ‘블랙스완’을 실시한다. 크루즈 선사들도 안전도와 신뢰도를 높이기 때문에 공동 훈련이 업계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안전문제에 관한 한 선박업계의 이해관계는 해안경비대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2005년 뉴욕주의 유명호수인 레이크조지에서 관광선이 전복돼 노인 20명이 숨졌는데 과다적재가 사고원인이었다. 하지만 승객 숫자나 적재화물은 법적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까지 성인 1인 체중을 1960년 마련된 63.5kg을 기준으로 해 적정 승객을 계산토록 허용한 것이었다. 이후 해안경비대는 미국인 체중이 그 사이 늘어난 점을 감안, 성인 기준 체중을 84kg으로 가혹하게 끌어 올렸다. 결국 업계는 적정 승객을 기존보다 무려 3분의 1이나 줄여야 했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