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국제영화제는 말 그대로 프랑스 밖 영화들에도 문호를 개방한 국제영화제다. 원칙적으로는 세계 어느 나라 영화든 칸을 찾을 수 있다. 아마 조건은 단 하나일 것이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면 된다는 것. 과연 그럴까. 칸국제영화제는 국경이 없고 모든 영화들이 공평하게 대우 받을까.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영화는 18편이다. 이들 영화의 국적은 어떻게 될까. 자본의 국경이 무너진 지 오래라 명확한 국적을 따지기는 힘들 것이다. 합작영화가 많은 시대이니 특정국가의 영화라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영국 영화전문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구분에 따르면 합작에 참여한 경우까지 모두 셈했을 때 경쟁부문 작품 들 중 프랑스는 9편의 영화에 관여했다. 18편의 영화 중 절반이 프랑스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와 독일이 3편이었고 영국과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가 2편이었다. 경쟁부문 초청작엔 14개국이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 영화진흥을 담당하는 기구인 유니프랑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관련된 경쟁부문 영화는 11편이다. 합작의 기준이 국가마다 모호하기에 나온 다른 수치이다. 유니프랑스 셈법대로라면 경쟁부문 작품 중 3분의 2가량이 프랑스 DNA를 보유한 셈이다.
완성도가 높으면 무조건 초청?
올 경쟁부문 18편 중 14편이 합작 등 결국 ‘프랑스 DNA’ 보유
순수하게 프랑스 국적을 가진 영화는 4편이다. 1960년대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영향을 준 누벨바그의 간판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신작 ‘굿바이 투 랭귀지’가 대표적이다. ‘아티스트’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작품상을 안았던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의 ‘더 서치’와 베트랑 보넬로 감독의 ‘생 로랑’도 100% 프랑스 영화다. 순수혈통 프랑스 영화만 따져도 경쟁부문 영화의 22.2%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경쟁부문 4편 중에 1편이 완전한 프랑스 영화이니 칸영화제가 프랑스 영화를 편애한다 해도 무방하다. 유니프랑스가 경쟁부문을 포함해 칸영화제 전체부문 상영작 중 프랑스 영화라 주장하는 영화는 64편이다(유니프랑스는 프랑스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 영화를 프랑스 영화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도면 칸영화제는 국제영화제가 아닌 국내영화제나 다름 없다.
칸영화제가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프랑스 영화들을 유독 선호하는 이유는 영화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칸영화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첫 회를 치렀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영화산업과 관광산업을 새롭게 일으키려 한 프랑스 정부의 의지가 반영됐다. 칸영화제의 설립 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있었다. 프랑스는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영화 종주국이다. 프랑스는 초기 영화사에서 한때 미국과 세계 시장을 양분했던 화려한 과거를 지녔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헤게모니는 미국으로 넘어갔고 제2차 세계대전은 결정타였다. 할리우드의 세계 시장 지배는 공고화됐고 프랑스 영화를 비롯한 유럽영화는 변방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
영화제가 타개책으로 제시됐다. 당연히 프랑스 영화들이 우대 받았고 유럽영화들이 많이 초청됐다. 제3세계라 할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영화들이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졌고 칸영화제의 사랑을 받았다.
상혼도 칸영화제 초청작의 ‘프랑스 영화’ 범람을 부추기고 있다. 칸영화제는 유럽 예술영화 시장 진출을 위한 주요 교두보다. 세계의 예술영화들이 칸영화제를 발판 삼아 유럽 시장을 뚫으려 한다. 유럽 예술영화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프랑스다. 프랑스 예술영화 시장에서 칸영화제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프랑스 업자들의 ‘작전’도 한 몫
제작 초기부터 자본 참여…말리 영화가 ‘메이드 인 프랑스’로 둔갑
예술영화들은 칸영화제 수상이나 상영 이력으로 프랑스 예술영화 관객들을 유혹하려 한다. 여기에 프랑스 ‘업자’들의 상업적 의도가 끼어든다. 장사가 될만한 프랑스 밖 예술영화들에 투자하고 돈을 들인 영화들의 흥행을 위해 칸영화제에 로비를 하기도 한다. 칸영화제 초청이 확정된 외국영화들에 프랑스 영화사들이 프랑스 상영권을 따내기 위해 뒤늦게 돈을 대는 경우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자본이 투입되면 프랑스가 합작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고 프랑스와 무관했던 영화도 프랑스 DNA를 가지게 된다. 홍상수 감독이 국내 감독들 중 칸영화제의 사랑을 유독 받는 이유가 이런 메커니즘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하는 영화인들도 있다. 유럽에서도 프랑스는 홍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많은 곳으로 꼽힌다.
아예 제작 초기단계부터 프랑스 자본이 전액 참여해 순수 프랑스 영화로 변신한 영화들도 있다. 올해 경쟁부문에 초대된 압덜라만 시사코의 ‘팀북투’가 좋은 예다. 시사코는 영화 불모지 말리의 영화 선구자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영화를 만들며 아프리카 예술영화의 대표 주자 중 하나가 됐다. ‘팀북투’는 2006년 만들어진 ‘바마코’에 이후 8년 만에 나온 그의 신작이다. 영화산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치 않는 말리 출신이기에 프랑스 자본의 도움 없이 ‘팀북투’의 제작은 불가능했다. ‘팀북투’는 말리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완전한 프랑스 영화로 언론은 취급하고 있다.
역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스틸 더 워터’는 프랑스ㆍ일본 합작인데 프랑스가 먼저 거론된다. 제작비 대부분이 프랑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 아닌 프랑스 영화인 셈이다. 예술적 성향이 강한 가와세의 영화는 모국 일본에서 투자 받기 어렵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1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창동 감독의 ‘시’는 프랑스 자본이 일부 투자됐다. 엄격히 따지면 한국 프랑스 합작영화였던 셈이다. 임상수 감독은 한때 프랑스 영화사가 기획하는 영화 제작을 위해 1년 가량 파리에서 체류한 적도 있다. 홍상수 감독 김기덕 감독 등도 프랑스 자본이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는 감독들이다. 이들이 프랑스에서 전액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칸영화제에 진출한다면 이들 영화 앞에도 프랑스 영화라는 호칭이 먼저 붙을 것이다. 칸국제영화제는 세계 영화인들의 축제이면서도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축제인 셈이다.
칸=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후기: 2012년 박찬욱 감독의 첫 할리우드 프로젝트 ‘스토커’가 완성돼 칸영화제 진출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 때 기자들과 영화인들 사이에선 작은 논란이 있었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서양 배우들과 함께 만든 ‘스토커’의 국적은 미국인가, 아니면 감독의 국적을 따라 한국영화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다행히도(?) ‘스토커’는 칸영화제에 진출하지 않아 논란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영화 자본과 인력 사이에 놓인 국경이 완전히 허물어진 21세기, 특정 영화의 국적에 대한 의문은 앞으로 더 커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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