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낮 칸국제영화제 주요 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발 앞에서 한 중년 여인이 영화표를 간절히 구했다. 그는 배지를 목에 건 사람들마다 “아무 표라도 없냐”며 절박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팔레 드 페스티발 앞에서 영화표를 구하려고 애쓰는 영화팬들은 흔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칸영화제는 불친절하기 그지 없으나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제는 ‘시네마 천국’이다. 제작비를 쉬 구하지 못하거나 상영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예술영화 감독,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영화인들에게 칸영화제는 든든한 후원자다. 특히 제3세계 영화에 칸영화제는 구세주나 다름 없다. 칸영화제는 정의로운 영화와 불우한 사람들에게 연대와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사회적 파장과 정치적 압박을 무릅쓰고서도 사회를 향해 온당한 목소리를 내는 영화다운 영화를 지지한다. 대중들에게 칸영화제의 문턱은 높고도 높지만 칸영화제가 배출한 영화들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그들을 열광케 한다.
칸은 너무 까칠하다고?
높은 문턱만 극복하면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는 ‘떼논당상’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반을 장식한 영화 ‘윈터 슬립’은 스크린 밖에서 마음을 숙연케 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터키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과 배우들은 검은 리본을 상의에 달고 영화 행사장 곳곳을 다녔다. ‘윈터 슬립’의 공식 상영회가 있던 날 레드 카펫 위를 걸을 때는 ‘소마’라 쓰인 종이를 들었다. 최근 터키에서 발생한 소마 탄광 붕괴로 인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매몰된 광부들의 생환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였다(한국의 몇몇 배우들은 세월호 참사로 국가적인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 화려한 레드 카펫 행사를 치를 수 없다며 불참했다).
멕시코 배우 셀마 헤이엑도 레드 카펫 행사에 참여했을 때 최근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소녀 납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브링 백 아워 걸스’(Bring Back Our Girls)을 적은 종이를 들고 레드 카펫 위를 걸은 헤이엑은 영화의 사회적 책임, 배우의 공적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치적 발언과 사회적 행동에 관대한 칸영화제의 전통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들이다.
칸영화제가 적극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2010년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를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사례 등이 이에 해당한다. 파나히는 반체제운동 혐의로 이란 당국에 의해 영화연출 금지와 가택 연금 조치를 당해 있다. 칸영화제는 그가 출국은커녕 집 밖에도 쉽게 나올 수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파나히의 이름을 심사위원단 명단에 올렸다. 파나히는 칸에 오지 못했고 칸영화제는 파나히의 빈자리를 두고 행사를 진행했다.
파나히에 대한 칸영화제의 지지는 2011년엔 좀 더 극적으로 이어졌다. 파나히가 집안에서 아이폰으로 만든 영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이란으로부터 극비리에 들여와 영화제 막판 깜짝 상영을 했다. 영상이 담긴 USB를 케이크에 숨겨 밀수하듯 영화를 들여와 상영한 것에 이란 정부가 강력 비난했으나 칸영화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독의 표현의 자유는 지켜줘야 마땅한 것이고 영화제는 정치적 고난에 처한 감독의 옹호자여야 한다는 강한 인식 때문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의 지지와 연대가 가장 명확히 드러난 영화는 ‘팀북투’이다. 이 영화의 감독 압덜라만 시사코는 말리 출신이다. 말리와 말리가 위치한 서아프리카는 영화의 사막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서구에서 활동하는 감독들이 아주 간혹 장편 영화를 만들 뿐 이곳에서 자생적으로 영화를 생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시사코는 그런 극한의 환경 굴하지 않고 영화작업을 하며 서구 평단과 학계의 지지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가 ‘바마코’(2006)이후 8년 만에 만든 ‘팀북투’를 칸영화제는 보지도 않고 경쟁부문에 초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제작을 입도선매하겠다는 욕심이 작용한 거라는 해석도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활동하는 영화 작가에 예우라 분석이 더 많다.
칸은 너무 돈만 밝힌다고?
감독과 배우들 모든 표현의 자유 포용…결국 '심장'은 영화였다
영화 변방으로 여겨지는 필리핀의 브릴란테 멘도사 감독이 ‘도살’로 2009년 감독상을 수상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도살’은 칸영화제 상영 당시 잔혹한 폭력 장면 때문에 기자들과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영화제 기간 매일 발행되는 영화 전문지들이 매긴 평점도 최하점을 기록했다. 국내 한 영화제의 관계자는 “영화의 수준과 질보다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묵묵히 영화를 만들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발언을 계속하려는 시도에 대한 격려”라고 해석했다.
화려한 레드 카펫 행사와 떠들썩한 파티가 외양을 빛내는 칸영화제는 돈에 의해 유지되는 까칠하고 거만하고 속물스러운 영화제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칸영화제의 심장은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영화제의 중심이었다.
“칸에 와서 학술적이고 원론적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칸영화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모두가 턱시도나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영화를 봐준다는 것만으로도 영화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최고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너무 (가슴이)뜨겁다.” ‘표적’으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을 찾은 창 감독의 감회 어린 말은 칸영화제의 진정한 정체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를 사랑하는 만인에게 칸영화제는 야박하나 미워할 수 없는 영원한 연인일 수밖에 없다. 결국… 칸은 ‘시네마천국’이다.
칸=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후기: 팔레 드 페스티발 안에 위치한 뤼미에르 대극장은 칸영화제의 중심부다. 경쟁부문 초청작들을 상영하고 개막식과 폐막식도 열린다. 칸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 복도에 두상이 하나 전시돼 있다. 영화 역사 초기를 굵직한 업적으로 장식했던 옛 소련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의 머리상이다. 프랑스 영화계가 수많은 스타와 유명 감독을 배출했는데 유독 그의 두상만 둔 이유는 무얼까. 만국 공통어인 영화 발전에 큰 힘을 쓴 에이젠쉬타인의 생을 기리며 칸영화제도 세계 영화를 대변하는 영화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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