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덩이에서 선 뽑아내는
佛 조각가 베르나르 브네
갤러리 현대서 '그립'展
휘갈긴 낙서처럼 보이지만
철판 잘라 만든 강철 드로잉
추상 화가로도 활동
단숨에 휘갈긴 낙서 같은 검고 굵은 선이 흰 벽을 차지했다. 박진감이 넘친다. 종이에 그린 게 아니다. 두께 3.5㎝의 철판을 잘라 만든 대형 강철 드로잉이다. 종이에 낙서한 것을 확대 출력해 철판에 붙인 다음 선을 따라 토치 불꽃으로 도려냈다. 500~700㎏의 묵직한 철제 부조이지만, 경쾌하고 자유로운 선이 무게를 잊게 만든다. 신경질적으로 그어댄 선들이 겹쳐서 사라지기도 하는 표정에는 무언가를 지워버리고 없애고 무시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브네(73)의 개인전에 나온 이 작품들은 한국에는 처음 선보이는 ‘그립(Grip)’ 연작이다. 그립은 낙서를 뜻하는 프랑스어 ‘그리불리아주(gribouliage)’를 줄여 브네가 만든 단어다. 그립 연작은 2011년 시작했다. 기존 작업인 ‘비결정적인 선’의 연장선에 있지만 더 자유분방하고 힘차다. 눈을 감고 휘갈겨서 작업한 것도 있다.
브네는 바라라 로즈, 도널드 쿠스핏 등 유수의 미술사학자들이 다양한 학술논문과 연구의 주제로 다뤄온 거장이다. 무거운 쇳덩이에서 선을 뽑아내는 조각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수학기호를 사용한 추상화, 석탄과 타르를 이용한 개념적인 작업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조각, 회화, 드로잉을 소개한다. 철제 부조인 ‘그립’ 연작 4점 외에 ‘그립’을 바탕으로 한 드로잉 12점, 수학을 소재로 끌어들인 회화 15점을 미국과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가져왔다. 특히 그립을 바탕으로 한 드로잉은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이다. 그림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는 수학 논문을 베껴 쓰거나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이미지로 차용했다. 사각, 원, 타원, 불규칙 다각형 등 여러 모양의 캔버스에 담긴 이 그림들은 첫인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강렬하다. 찾아내야 할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질문이다.
한국에서 브네의 첫 개인전은 1994년 토탈미술관에서 열렸다. 이후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과 201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60여 개 미술관에 들어가 있다. 파리의 에펠탑 앞에 세워진 높이 30m의 철제 조각 등 세계 곳곳의 주요 광장과 공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는 페럼타워(동국제강 사옥), 토탈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 여러 곳의 야외 공간에 설치돼 있다. 전시는 15일까지 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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