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 등 경매시장 광풍
중국·남미·아랍 부호 가세
올 들어 곳곳서 최고가 경신
차익 노리는 펀드도 급성장
범죄 수익 활용 가능성에
낙찰가 거품 붕괴될 우려도
지난 5월 중순 미국 뉴욕 도심의 록펠러 플라자. 저녁 무렵 세계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 본부가 입주한 이 빌딩 주변으로 고급 리무진이 잇따라 모여들었다. 명품 옷으로 우아하게 몸을 휘감은 상류층 방문객들이 고급 승용차 문을 열고 나왔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방문객은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가 중력을 거스르는 자세로 요가하는 조각상(마크 쉰 작품)에는 눈길 조차 주지 않고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간 곳은 지난 해부터 열기를 내뿜고 있는 미술품 경매장이었다. 2013년 11월 이 경매장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의 거부 엘레인 와인이 영국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가지 연구’(Three Studies of Lucian Freud)를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 4,240만달러(1,500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크리스티는 당시 하루 경매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포함해 총 6억 9,150만달러의 미술품을 팔았다.
6개월 전의 열기는 이날도 이어졌다. 래리 게이거지언, 프랑수아 피노, 마이크 제이콥, 올리비에 사르코지(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이복 형제) 등 세계 미술품 거래시장을 주름잡는 거물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경매가 시작됐다. 신분 노출을 원하지 않는 큰 손 고객들은 경매장 천장 쪽에 설치된 ‘라이트 박스’로 불리는 각각의 은밀한 공간에서 경매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소강 상태였지만 중국에서 행운의 숫자로 통하는 8번 경매물이 매대에 나오면서 뜨거운 랠리가 시작됐다. 알렉산더 칼더(1898~1976)의 ‘물고기’(Poisson Volant) 모빌에 수집가들의 경쟁이 붙었다. 미술 경매계 거물인 게이거지언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양의 수집가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동양 수집가를 대신해 참가한 크리스티 홍콩지부 쉰 리 국장이 당초 예상가의 두 배가 넘는 2,590만달러(267억원)를 외치고 난 뒤에야 이 작품의 주인이 결정됐다.
경매 가격의 깜짝 행진은 계속됐다. 크리스토퍼 울의 영어 문장을 형상화한 작품에는 2,370만달러 가격표가 붙었고, 바넷 뉴만의 작품은 경매 끝에 8,400만달러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 믿기지 않는 가격이 속출하자 고가 미술품 경매에 익숙한 부유층 청중 사이에서도 탄성이 잇따랐다.
크리스티 경매장의 열기가 보여주듯 전세계 미술품 시장에는 ‘광풍’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투기성 자본이 급속히 유입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침체됐던 세계 미술품 시장 거래규모는 이미 지난해에 2007년(480억유로)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고 올해 들어서는 곳곳에서 사상 최고의 기록을 내놓고 있다.
미술품 시장에 불이 붙은 이유는 뭘까.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선진국 중앙은행의 금융완화 조치로 자본시장에 돈이 넘쳐나는 데다 새롭게 거부 반열에 오른 중국과 아랍, 남미 거부들이 미술품 수집가로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시장 동향에 정통한 ‘웰쓰-X’ 연구소에 따르면 신흥국 거부들이 급증하면서 2013년 개인재산 규모가 10억달러(1조원)가 넘는 사람이 2,170명에 달한다. 이들은 축적한 재산의 일부를 세계 유명 화가들의 고가 작품을 전시하는 개인 박물관에 투자하고 있다. 유럽 거부와 박물관이 19세기 이전의 기존 유명 작품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바람에 신흥국 수집가들은 현대 작가의 작품에 열을 올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의 경매 가격이 최근 몇 년간 수직 상승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흥국 수집가의 등장으로 미술품 경매 시장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고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현대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시장 곳곳에서 미술품 투기와 그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개인 투자자에게서 1인당 50만~100만달러(5억~10억원)의 자금을 끌어 모아 최근 가격이 급등한 현대 미술품에 투자하는 펀드가 급성장하고 있는 현상이 이를 대변한다. 전문가들은 2000년대 말 국제원유가격 상승에 투기자본이 개입됐던 것처럼 최근 미술품 가격 상승에는 단기 차익을 노리고 미술품을 사들이는 ‘미술품 펀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파인아트 펀드’ 등 주요 미술품 펀드의 수익률은 연 평균 3% 내외에 불과한 시중금리의 서너 배에 달한다. 이 펀드는 유치한 투자자금을 6개의 하부 펀드로 나눠 운용하고 있는데 설립 시기가 빨라 사들인 미술품을 처분하는 단계인 최초 2개 펀드의 연평균 수익률은 16%에 달한다. 이 펀드 관계자는 “지난 7년간 100개 미술품을 사고 팔아 총 1억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미술품 펀드 연합회’의 엔리케 리버만 회장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미국에서만 약 25개 미술품 펀드가 영업 중이며 새롭게 주목 받는 신예작가에 투자하는 경우 10~20%의 수익률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동이 간편하고 정확한 시장가격을 정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고가 미술품이 탈세와 범죄 수익의 세탁 통로로 활용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조지나 애덤 미술담당 전문기자는 “고가 미술품의 지하거래 규모가 커지면서 거대 마약 밀매상들이 자금 세탁이 훨씬 용이한 미술품을 밀매 대금으로 선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곳곳에서 투기 우려가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세계 미술품 시장의 거품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금융위기가 반복됐던 것처럼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미술품 시장에서도 가격 폭락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애덤 기자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형성된 미술품 가격의 거품이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붕괴했던 것처럼 향후 정치적 상황과 금융시장 격변에 따라 미술품 시장에 새로운 충격이 가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우려했다. 크리스티 경매장 앞의 ‘신화 속 비너스’(Myth Venus)로 불리는 케이티 모스 조각상이 지금은 130만달러로 평가됐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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