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물질 연구에 매진한 생화학자
살충제 '젝트란' 개발해 명성
자신ㆍ아내를 실험 대상 삼으며 200종 넘는 마약 만들어 효능 알려
새로운 마약이 시장에 등장하면 당국은 샘플의 약성(藥性)을 검토한 뒤 금지 여부를 결정한다.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국가들이 주로 채택하는 네거티브 규제, 즉 포괄적으로 허용하되 불법 대상만 특정해서 단속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불법 마약과 효능 면에서 별 차이 없는, 때로는 더 강력한 신종 마약도 금지약물로 지정될 때까지 길게는 1년 넘게 합법적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유럽연합 마약중독감시센터(EMCDDA)에 따르면 2009년 한 해에만 24종의 신종 마약이 등장했다. 그게 10년에는 41종, 11년 49종, 12년 73종으로 늘었고, 지난 해도 10월까지 56종의 새로운 합성 마약이 시장에 나왔다.
유엔 ‘2013년 세계마약리포트’는 “국제적인 마약 규제시스템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새로운 유해약물들은 꾸준히 시장에 진입하고 있으며, 속도나 창의성 면에서 규제가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그 해 10월 31일자 기사에서 “화학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인터넷에 널린 정보들만 활용하면) 몇 주면 새로운 합성 마약을 만들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썼다. 가디언은 “이제 당국은 약물의 합법 불법을 따질 게 아니라 어떤 약물이 얼마나 해로운지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엑스터시의 대부’ 알렉산더 슐긴(Alexander Shulgin) 박사가 6월 2일 자신의 미국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88세.
생화학자인 그는 온 생애 동안 사실상 환각물질 연구에만 매진, 200여 종이 넘는 ‘마약’을 합성했고, 그 효능을 세상에 알렸다. 그 중에는 그에게 영광과 오명을 동시에 안긴 ‘엑스터시’도 있었다. 그는 마약 합법화의 선구적 주창자였다. 마약을 합법화하면 관련 범죄도 줄고 단속 비용도 절감되며 ‘불법의 은밀한 매력’이 사라져 상용자도 줄어들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음주운전을 단속하듯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못하게 막고, 마약 복용을 강제하거나 아동에게 마약을 제공하는 일만 단속하고 중독으로 고통 받는 이가 있다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에게 마약은 순수한 ‘개인적 선택의 문제’였다.
슐긴 박사의 마약 합법화 논리가 그런 현실적 판단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궁극적 연구 목적은 인간의 심적 기제(mechanism of mind)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의지로 열어젖힐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드러나게 하는 촉매로서 환각물질의 가능성을 긍정했다. 그에게 마리화나나 아편 같은 환각물질은 담배나 술, 커피처럼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며, 환각상태 역시 태초이래 인간이 누려온 고유한 본성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로 돈을 구하지 않았고, 영리를 목적으로 마약을 만들어 거래하고, 낯선 쾌락만을 위해 약물을 남용하는 세태를 개탄했다. 그는 자신의 책 피칼에 “(마약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게 아니라) 탐욕의 인간이 마약을 타락시켰다(MDMA had been ‘sidetracked into the Yahoo generation’)고 썼다. 짧은 약력만으로 흔히 연상하는 타락한 과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아주 순수했거나 순진했고, 말년에는 쪼들리며 살았다.
슐긴은 1925년 6월 17일 러시아 이민자 아버지와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각각 공립학교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쳤지만 슐긴은 어려서부터 과학에 심취, 초등학생 때부터 캘리포니아의 집 지하실에다 실험실을 갖춰두고 비커를 갖고 놀곤 했다고 한다. 16살에 하버드대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시작하지만 2차대전이 나면서 미 해군으로 입대, 만기 전역한다. 제대 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 전입, 생화학 박사학위(1955)를 딴 뒤 ‘바이오-래드(Bio-Rad)’라는 연구소에 잠시 근무하다 미국의 다국적 화학회사인 ‘다우 케미칼(Dow Chemical)’에 취직해 64년까지 다닌다. 그는 세계 최초의 생분해성 살충제 ‘젝트란(Zectran)’을 개발,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겼고 그 보상으로 어떤 연구와 실험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의 본격적인 환각 물질 연구는 그 즈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과학자나 예술가가 자신의 영역에서 천국의 열쇠 혹은 존재와 세계의 비밀을 찾으려고 하는 건 그리 이상할 것도, 드문 일도 아니다. 슐긴의 성배(聖杯)는 환각물질이었다. 그가 환각물질에 꽂힌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는 군 시절 일화 한 토막을 ‘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군대에서 엄지손가락이 감염돼 간단한 수술을 받은 일이 있는데, 간호사가 건네 준 오렌지주스를 마신 뒤 유리잔 바닥에 남은 하얀 결정들을 보고 그게 진정제나 마취제라 여겼고, 주스를 마신 뒤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정은 덜 녹은 설탕이었다. 슐긴은 ‘나를 무의식 상태에 들게 한 그 미량의 설탕’의 위력에 놀랐고, 위약 효과를 포함해 자신의 육체와 세계를 지배하는 마음의 작동 기제에 호기심을 지니게 됐다고 말했다.
1950, 60년대의 미국은 반(反)문화의 전성기였고 그 역시 환각물질을 체험했다. 50년대 말 ‘메스칼린(페요테선인장에서 추출한 천연환각물질)’을 한 뒤의 경험을 그는 ‘폭발적(I first exploded…)’이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온 우주가 마음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에 접근할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 사항이다.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안에 있고, 거기에 닿을 수 있는 능력을 촉발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화학물질이다”(NYT, 2005.1.30)
다우 케미칼이 부여한 직업적 자유 안에서 그는 환각물질 실험에 매달렸고, 연구 결과를 ‘네이처’나 ‘유기화학저널’ 등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이 당시 사회의 보편적 윤리의식과 조화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의 ‘순수한’ 의도와 성과가 엉뚱하게 이해되고 활용될 소지도 있었을 것이다. 기업 이미지가 악화할 것을 우려한 회사측은 그에게 논문 발표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고, 한계를 느낀 그는 66년 말 직장을 그만둔다. 그는 약 2년여 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신경학과 약학 등을 공부하며 연구 자문과 강연 활동으로 시간을 보낸 뒤 자신(그리고 부모의)의 캘리포니아 라파예트의 집에 연구실을 연다. 유년의 지하실이 아닌 창고 하나를 통째로 개조한 그 환각물질 전문 연구실을 그는 ‘농장(The Farm)’이라 불렀다.
그가 미 마약단속국(DEA)과 인연을 맺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의 친구로 훗날 미 서부지역 DEA 연구실 총괄 책임자가 되는 밥 세이거의 주선으로 그는 DEA와 다양한 합성 마약 정보를 교류하고, 샘플 성능 실험 등을 돕는다. 또 마약 사건 관련 법정에 출석, 특정 마약의 효능 등을 증언하기도 했고, 현재 미국 마약단속 규정의 근거가 된 ‘금지약물 가이드북’(1988)을 집필하기도 했다. 1994년 DEA와 사이가 틀어져, 단속 요원들이 그의 ‘농장’을 압수수색하기까지 약 15년간 그는 DEA가 발행한 ‘1급 규제약물(Schedule 1)’ 관리자격증 보유자였다.
그가 ‘엑스터시의 대부’라 불리곤 있지만, 엑스터시를 최초로 합성한 것은 1914년 독일의 종합 화학ㆍ제약회사인 머크(Merck)사였다. 머크사는 혈액응고제를 개발하던 중 우연히 환각성 물질 ‘MDMA(3,4-매틸렌디옥시-메탈암페타민)’를 발견했으나 사장시켰다고 한다. 슐긴은 그의 강의를 듣던 한 대학원생이 제공한 정보를 확인, 새롭고 간단한 방법으로 MDMA를 재합성하는 데 성공한다. 효능에 놀란 그는 친구인 레오 제프라는 한 정신과 의사에게 MDMA를 소개했고, 제프 박사는 거의 미국 전역을 돌며 동료 의사와 환자들에게 그 약의 처방을 권했다. 그게 1976년 무렵이다. 하지만 그 약은 슐긴의 의도와 달리 어쩌면 운명적으로, 각종 클럽과 술집으로 번져 나갔고, ‘엑스터시’ 혹은 ‘레이브 드럭(Rave Drug)’이라는 유혹적인 이름을 달고 마리화나와 함께 마약 대중화의 선봉에 섰다. 80년대 중반 규제약물로 지정될 때까지 근 10년 동안 엑스터시는 정신과 진료, 특히 대화요법과 참전 군인들의 심리불안 극복 요법에 합법적으로 처방됐다. 80년대 낸시 레이건이 주도한 마약반대캠페인 ‘Just Say No!’ 시절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던 그는 “나는 불법적인 일을 일체 하지 않는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합성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고, 만들어진 물질을 복용해보기 전에는 환각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다. 내가 그것들을 맛보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LSD를 최초로 합성한 호프만 박사나 폴리오 벡신을 개발한 솔크가 그랬듯이, 슐킨은 합성약물의 효능과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기존 약물의 분자구조를 변형하거나, 천연 환각물질에서 추출한 성분들로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에서부터 점차 양을 늘려가며 복용하면서 적정 용량과 효능을 확인했다. 안전성과 효능이 입증되면 81년 결혼한 아내 앤(83)에게 투여했고, 또 60년대부터 어울린 그의 오랜 친구들에게 효능을 재확인했다.
슐긴은 다섯 권의 책을 펴냈고, 자비 출판한 피칼(Pihkal: A Chemical Love Story(1992)과 티칼(Tihkal: A Continuation(1994)은 유기화학분야의 고전으로 꼽힌다. ‘내가 알고 사랑했던 페니실아민(Phenethylamines I Have Known And Loved)’과 ‘트립타민(Tryptamines)’의 머릿글자를 딴 피칼과 티칼은, 각각 슐킨 자신이 두 물질을 기반으로 합성한 모든 환각물질의 주관적 효능과 객관적 정보를 기록한 방대한 책이다. 그 책들은 다소 난해하지만, 슐킨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이자, 환각물질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적 가이드북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조제용 ‘요리책’이기도 하다고 ‘The Whole Earth’라는 잡지의 한 편집자는 서평에 적었다.
공교롭게도 피칼이 출간되고 2년 뒤인 1994년 DEA는 슐긴의 연구실을 급습, 당국이 부여한 권한을 벗어난 몇 가지 사실들을 밝혀낸다. 그는 DEA자격증을 박탈당하고 2만5,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다. 그 전까지 두 차례의 정례적인 감사에서는 전혀 문제가 안 됐던 사안이었지만, 마약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책까지 낸 슐긴과의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DEA 샌프란시스코지부 대변인은 한 인터뷰에서 “그의 책들은 불법 약물 조제법 안내서와 다름없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고, 실제로 우리 요원들이 불법 실험실들을 수색하다 보면 그의 책 사본들이 발견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의 히피 등 반문화 신봉자나 극단적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신적인 영웅으로 꼽히지만, 다수의 일반인에게는 영화 ‘백투더퓨처’의 브라운 박사처럼 호기심과 장난기 넘치는 천재, 아니면 메리 샐리의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같은 기괴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반면 2005년 FDA는 말기암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엑스터시를 처방하는 방안을 연구하겠다는 하버드대의 계획을 승인하는 등 환각물질에 대한 다양한 약리 실험들이 수많은 대학과 전문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1966년 모든 실험조차 금지된 LSD조차 올 초 연구 대상에 포함됐다. 슐긴의 저서와 연구기록은 그 실험들의 중요한 안내서로서도 기여하고 있다.
슐긴은 2008년 동맥판막치환술을 받았고, 201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최근에는 경미한 노인성 치매증상을 앓았다. 사인은 간암이었다. 그는 소액의 주식투자 수익금과 사회보장보조금, 자신의 땅에 중계기를 설치한 전화회사 두 곳이 지급하는 토지사용료에 의존해 ‘검소하게’ 살았고(nyt),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산 일부를 처분했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알렉산더슐긴연구소 자료)
그는 2005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까지 4,000회가 넘는 환각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그 체험들을 합치면 그는 생애 중 약 12년을 ‘하이(high)’상태로 지낸 셈이라고 가디언 기자는 추정했다. 아내 앤은 그 세월의 대부분을 함께 했다. 슐긴의 두 번째 아내(첫 부인은 사별)였고, 앤의 네 번째 남편이었던 두 사람은 함께 실험하고 체험하고 집필하며 해로했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앤은 그 세월을 회고하며 언제나 스릴 넘치는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문을 연다고 상상해보세요. 심지어 거기 문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수도 있어요.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했어요.”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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