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故이영만군 어머니의 울분 "몸 불편했던 아이지만 튼튼하고 밝게 자랐는데… " 재판·서명·국조 모니터링 위해 전국 곳곳 강행군 "일부 의원들 진실 규명 시늉만…절대 포기 않겠다"
“세월호 사고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럴수록 죽은 아들만 자꾸 그리워지네요.”
단원고 2학년 6반 고 이영만(17)군의 어머니 이미경(49)씨는 자식 뒷바라지만 할 줄 알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요즘 이씨 일상은 전국 곳곳을 누비는 강행군의 연속이다. 품에서 아들을 빼앗아간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달 24일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이른 아침 광주지법으로 달려갔다. 재판 내내 눈물이 쏟아지고 치가 떨리는 것을 간신히 견뎌낸 이씨는 마음을 다스릴 겨를도 없이 진도 팽목항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자식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3일간 팽목항에 머문 이씨는 안산이 아닌 대구로 또다시 발길을 돌렸다. 폭염 속에서 사고 진상 규명을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나서야 28일 안산으로 돌아왔다.
이씨의 고된 행군은 30일에도 이어졌다. 첫 세월호 국정조사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자정을 넘겨 다음날 새벽까지 국회를 지켰지만 억울함과 한숨만 쌓였다고 한다. 구조자 숫자를 잘못 파악하고 ‘전원 구조’ 소식을 전파한 경위에 대해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은 책임을 해경에 떠넘기거나 “모른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일부 의원들도 치열한 질문을 하는 대신 개인 감상만 나열하거나 자리를 비웠다. 이씨는 “진실을 규명한다는 시늉만 할 뿐 오히려 무엇인가 감추려는 것만 같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억울함이 솟구칠 때마다 아들 생각은 절실해졌다. 이씨에게 영만군은 태어날 때부터 안타깝고 애틋했다. 예정일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난 영만군은 식도가 위에 붙어있지 않고 일부가 기관지쪽에 붙어있는 ‘기관지식도루’였다. 음식을 먹으면 기관지로 넘어가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젖먹이 아이를 눕혀 재우지 못하고 쿠션을 등에 받쳐서 비스듬히 재웠다. “올 때도 힘들게 온 아이였는데 갈 때도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렸네요.”
하지만 영만군은 누구보다 튼튼하고 밝게 자랐다. 석호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어른들과 함께 뛴 5㎞ 미니 마라톤에서 4등을 차지할 만큼 달리기를 잘했다. 한 살 위 형 영수(18ㆍ수원외고 3학년 재학)군과 나란히 초등학교 회장 부회장도 했다. 이씨는 “영만이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아이와 함께 미래와 희망을 잃었다”고 눈물을 쏟았다.
영만군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씨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을 영만이가 좋아해 CD를 구해 추모원에 넣어주려고 했는데 발매가 되지 않아 못 구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삶이 힘들어 10년을 넘게 하늘 한번 안보고 살았다는 이씨는 요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 있을 영만군과 눈이라도 한번 마주칠 수 있을까 해서다. 꿈에서라도 아들 얼굴을 한번 보려고 영정사진까지 품에 안고 잔다. 아직 아들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이씨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엄마의 아들로 와줘서 고맙고 행복했다”고 되뇌고 있다.
앞으로도 진실 규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씨는 “사고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아니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그것이 부모들의 마음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기중기자 k2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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