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눈치보며 말바꾸고
저물가 상황 방관하고
인사 소용돌이도 여전
매월 한 차례씩 열리는 금리 결정을 위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금융시장, 특히 채권시장 참가자들은 회의 뒤 금통위 의장인 한은 총재의 기자회견 내용에 귀를 쫑긋 세우며 점심을 거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기엔 한은 총재가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 그리고 향후 금리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중수 전 총재가 의사봉을 쥔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좌회전 깜박이를 켰다가 직진하는가 하면, 아예 예고도 없이 우회전을 하는 등 논리가 그때그때 바뀌고 뒤집히면서 신뢰가 허물어졌기 때문. 채권 시장에서는 “한은 총재보다 정부 실세의 한 마디, 한은의 경제전망보다는 기획재정부의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이 금리 결정에 더 영향을 준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나돌 정도였다.
‘정통 한은맨‘ 이주열 총재가 바통을 넘겨 받으면서 시장은 다시 이 총재의 ‘입’을 주목했다. 분명 큰 변화가 있을 거란 믿음이 깔려 있었다. 취임 100일 동안 가진 4번의 금리 결정 금통위 회의. 처음 한 두 번은 장황한 김 전 총재의 발언과 달리 간결한 이 총재의 설명에 우호적인 평가가 많았다.
문제는 설명 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김 전 총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총재 역시 깜박이를 바꿔 켰다. 금리 방향은 인상에서 인하 쪽으로 돌아섰고,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와 관련해서도 부정적이었던 기존 견해와 달리 “신중히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으로 물러섰다. “한은이 현실적인 경기 인식을 하고 있는 것”(성태윤 연세대 교수)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그 보다는 최경환 경제팀에 끌려 다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앞선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말 바꾸기 사례가 하나 둘 늘어날수록 한은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했고,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와 한은이 똑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가계부채에 대한 걱정은 누가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유례없는 저물가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것도 한은의 신뢰 저하로 이어진다. ‘물가 안정’을 제1 목표로 하는 한은이 2013년부터 3년간 중기 목표로 잡고 있는 소비자물가는 2.5~3.5%. 하지만 2013년 1월 이후 지금까지 18개월 동안 단 한번도 목표 하단(2.5%)에조차 근접한 적이 없다. 올 들어 조금씩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6월 상승률이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은 “물가목표는 3년간의 중기 목표인 만큼 유효하다”는 입장만 되풀이한다. 편한 대로 목표를 높게 잡아놓고 조금씩 발을 빼는 모습이다. 물가 전망이 계속 뒷걸음치는 것과 관련해서도 입맛에 따라 전망을 손질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될 정도다.
이러다 보니 8월 금리 인하의 적정성을 두고도 논란이 클 수밖에 없다.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이제서야 금리를 내리게 된다면 미국은 10월이면 양적완화를 종료하고 금리 인상 채비를 갖추는데 그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주열 체제에서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인사 소용돌이도 한은의 위상을 갉아먹는 요소다. 지난 달 국ㆍ실장급 인사에서 적절한 안배를 하며 “비교적 무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박원식 부총재, 강태수 부총재보 등 이른바 ‘김중수 사람’들이 하나 둘 옷을 벗으면서 여전히 갈등 요소가 잠복해 있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2, 3개월이 한은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자칫 삐걱댈 경우 시장이 이 총재가 아니라 최 후보자의 입만 쳐다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시장이 중앙은행을 주시하고 금리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있어야 하는데 자칫 중앙은행의 존재감 약화가 지속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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