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을 맡은 자는 서럽습니다.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닌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도 먹어야 합니다. 비난을 당할 때 마다 ‘왜 하필 나냐’는 생각이 간절할 겁니다. ‘쌀 관세화’에 앞서 준비 작업을 맡은 농림축산식품부 식량정책 부서 공무원들 심정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정부는 지난 18일 쌀시장 전면 개방을 선포했습니다. 수입쌀 의무수입물량(MMA)의 증량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게 정부 논리입니다. 쌀 관세화가 결과적으로 한국 농업에 약이 될 지 독이 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습니다만, 관세화 이외엔 안타깝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일부 농민들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농식품부는 쌀 관세화 관련 공청회나 설명회를 열 때마다 성난 농민들의 욕설과 고함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자세 통상 외교로 식량주권을 포기하려 한다’는 굴욕적인 비난도 들었습니다. 관세화에 조건부 찬성하는 농민들마저 구체적 농가소득 안정 방안을 내놓으라고 압박했습니다. 이는 예고된 반발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지난 20년간 정치권과 공무원들이 차일피일 미뤄왔을 뿐이죠. 결국 20년 지난 지금 총대를 메게 된 곳은 농식품부 식량정책 부서. 통상 담당 부서가 아니지만 쌀 관세화가 국내 쌀 정책과 밀접하다는 이유로 주무 부서가 됐습니다.
물론 정책 개발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도 함께 했습니다만 ‘악역을 맡아야 하는 순간’에는 항상 농식품부만 보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쌀 관세화는 통상 이슈인 만큼 산업통상자원부도 농식품부 못지 않은 주무부처지만 장관이 이를 언급하거나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경제 관련 정책에는 언제나 맏형 노릇을 맡았던 기획재정부도 쌀 관세화 관련해서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18일 기자회견 때도 농식품부는 장관이 직접 나온 반면, 산업통상자원부는 2차관이, 기재부는 국제경제관리관(실장급)이 나와 묘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농식품부는 앞으로도 당분간 악역을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 정한 관세율과 쌀 산업 대책을 조만간 내놓아야 하는데 여전히 뜨거운 이슈인 만큼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비난을 완벽하게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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