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5. 오후 9시, 영원의 시간에서 지우고 싶은 그 몸서리치는 시간
늘 내 곁에 있다고 믿은 님이 사라진 지금, 이제 예술이 답할 차례다
소년은 그림을 잘 그렸다. 소년은 가끔 추상화를 그렸고, 그래서 낙제점을 받곤 했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에 바치는 희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년의 외삼촌은 소년에게 곧잘 말했다. 무슨 일에나 희생이 있기 마련이고, 예술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고. 이 이야기는 옛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 유리 콜리네츠의 청소년소설 ‘미사네 외삼촌’(강민숙 역ㆍ영웅ㆍ1989)의 한 대목을 내 식으로 풀어 쓴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창조를 으뜸으로 삼는다. 창조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부엌에서 숟가락을 찾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말하자면 남들이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풍날의 보물찾기 같은 것도 아니다. 보물찾기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못 찾는 보물을 찾은 아이가 있지만,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고 보물을 찾은 아이는 늘 바뀔 수 있다. 다른 아이가 아닌 그 아이가 보물을 찾았다고 해서 그 아이의 삶도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예술이라는 이름을 걸고 찾아야 할 것은 부엌의 숟가락이거나 소풍날의 보물인 종이딱지일지도 모른다. 숟가락이나 보물딱지는 그 이상의 것일지 모른다. 모파상은 자기 스승 플로베르의 말을 빌려 어떤 사물이건 그 사물에 맞는 단 하나의 표현이 있다고 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 그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보고 이미 말한 그대로 사물을 본다. 옛날에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결을 보았고, 그래서 ‘물결치는 바다’라는 말을 썼다. 뒷사람들은 ‘물결치는 바다’라는 말에 귀가 익어서 바다에서 물결만을 보려고 한다. 그 진부한 표현들을 버리고 진부한 시선을 바꾸어 오래 사물을 보고 있으면 그 사물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고, 그래서 새로워진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저 프랑스의 소설가는 말했다. 숟가락과 보물딱지로 다시 돌아오면, 이제까지 그것들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 없었기에 숟가락은 여전히 숟가락일 뿐이고, 보물딱지는 여전히 보물딱지일 뿐이라고 말해야겠다.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말이 쉽지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래 기다려야 하고, 사물에 자신의 온갖 신경을 다 바치면서 쉬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저 러시아의 소년과 그의 외삼촌이 말하는 ‘예술의 희생’은 그 고통에서 그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단 하나의 표현’은 이미 있었던 모든 표현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바꾸고, 그래서 끝내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꾸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한 편의 시 때문에, 한 폭의 그림 때문에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차라리 끔찍하게 여긴다. 그래서 추상화를 그린 소년은 고지식한 선생에게 낙제점을 받는다. 소년은 벌써 제 예술 때문에 희생자가 되어 있다.
세상이 낯설어진다는 말이 의심스러운가. 그러나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알랭은 농부가 보는 세상과 선원이 보는 세상을 비교했다. 농부는 자연이 마련해준 땅 위에 집을 짓고 밭과 논을 일구고 그 사이에 길을 낸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과 비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씨앗을 거둔다. 세계는 그 농업의 동업자와 같다. 그에게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인간을 위협하고 지나가는 재난일 뿐이다. 낯익은 세계는 늘 다시 복구된다. 그에게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졌고, 그 최상의 상태는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그러나 그가 배를 타고 일단 난바다로 나가게 되면 세계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더는 고집할 수 없다.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닷물이며, 언제라도 배를 뒤집을 수 있는 거대한 물너울이며, 물속에 숨어 있는 암초이며, 예고 없이 불어오는 돌풍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일순간도 쉬지 않고 투쟁해야 한다. 배를 띄울 잔잔한 물이나 순풍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괴물이 잠든 사이에 몰래 훔쳐낸 덧없는 기회에 불과하다. 그는 아무런 우군도 없이 물질이 날카롭게 날을 세운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나 같다. 농부는 낯익은 자연 속에서 그 자연이 만들어 놓은 디자인 속에서 살지만, 선원은 허허로운 물질 속에서 제가 만드는 디자인으로 물질과 싸운다.
예술가의 일은 농부들의 세계에 선원들의 세계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이미 준비된 디자인을 유일한 디자인으로 여기고 거기 묻혀 살지만, 예술가는 그 디자인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가 보기에 이 디자인은 세상의 참 모습이 아니다. 세상의 눈가리개에 불과한 이 디자인은 필요 없이 거추장스러우면서도, 미래의 씩씩한 삶을 끌어안기에는 너무나 허술하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인간 디자인을 이 세계에 들고 들어오려는 사람이다. 그의 디자인은 낯설다. 다른 사람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조차 낯설기에 그 낯선 세계의 최초 희생자는 그 자신이기도 하다. 낯익은 세계에 낯선 세계를 연결해야 하는 고역도 또한 그의 희생이다. 이 희생을 생각하며, 한용운 선생의 시 ‘당신이 가신 때’를 시집 ‘님의 침묵’에서 읽는다.
당신이 가실 때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스도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가을바람이 처음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습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도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 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 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붓대를 잡고 남의 불행한 일만을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신의 가신 때는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내겠습니다
시는 기이한 상상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이해하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시간을 끝없이 긴 한 폭의 비단으로 생각하자. 그 비단은 아름답지만 수선하기 어려운 상처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가신 때”가 바로 그 상처다. 말을 바꾸자면 님과 이별했다는 기억이 그 시간의 상처다. 시인은 이 시간_비단에서 그 상처 난 부분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한다. 이 결심이 실행되면 상처는 사라지겠지만 한 폭의 비단은 두 조각으로 나누어질 것이니, 비단은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인에게는 또 다른 계책이 있다. 두 도막 난 비단의 이쪽 조각에는 내가 있고 저쪽 조각에는 님이 있으니 님과 내가 손을 맞잡고 서로 당기면 비단은 다시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님과 내가 이별했다는 기억, 바로 그 시간의 상처가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아니 이별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 될 것이다. 님과 나는 늘 함께 있었으며, 영원히 함께 있게 되리라. 어찌 당신이 “가신 때”를 끊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시인이 이별한 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두 도막이 난 시간을 잇댄다 한들 어떻게 헌데 아문데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은 이런 물음에 말이 궁하지 않다. 앞의 질문에 대해서는 님을 기필코 만나리라는 ‘믿음에 의해서’라고 대답하고, 뒤의 질문에 대해서는 님과 나의 ‘사랑에 의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정직한 당신은 또 묻는다. 사랑과 믿음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시를 다시 읽는다. 님은 이 세계에 없었다. 시인은 님이 늘 자기 곁에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시골에서 병든 몸으로 눈 떠보니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았다. 님이 거기 있는 디자인에 오래 길들었던 그에게 그 허위의 님이 사라지니 그 디자인도 사라졌다. 세상은 처음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선원에게 그렇듯 황량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이제 님이 없으니 님의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다짐이야말로 님과 내가 만나리라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님이 없기에 비로소 님이 있는 세계의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야말로 님과 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해 선사는 또 한 세상의 디자인을 생각한다.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들은 인천에서 배 떠나던 그 시간을 “영원의 시간”에서 지우고 싶어 잠을 자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몸서리치는 기억을 누가 지울 수 있겠는가. 예술의 희생보다 세상의 희생이 먼저 있다. 예술이 세상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있다.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믿음과 사람이 그렇게 어렵고, 믿음과 사랑이 그렇게 절박하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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