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 그린 장승업 땐 비슷한 점 많아 우쭐하기도
상상못할 위압감ㆍ궁금함 겹쳐 미치도록 힘들고 강박관념 시달려
'이순신 3부작' 속편 안 합니다
여전했다. 뜨거웠다. 말과 말 사이에서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고 눈엔 정열이 가득했다. 언제나 스크린에 뜨거운 기운을 쏟아내곤 하는 배우다웠다. 하나 이번엔 좀 달랐다. 민족의 성웅으로 호명되는 실존 인물을 연기해서 그럴까. 영화 ‘명량’ 속의 그는 끓어오르면서도 차가운 모습을 선사했다. 불타는 얼음, 하이드레이트 같은 연기라고 할까. 이순신 장군 역으로 ‘취화선’ 이후 10년 만에 사극에 도전한 최민식을 23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사자후를 토하듯 그는 열성을 다해 답했다.
최민식이 이순신을 연기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설왕설래가 오갔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신뢰도 많았으나 의구심도 적지 않았다. 그의 출연작들을 되돌아보면 그럴 만도 했다. 성스러운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나마 위인이었던 ‘취화선’의 장승업은 술과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최근작 ‘악마를 보았다’는 “집사람이 ‘영화 찍으라고 그랬지 미친 짓 하라고 그랬냐’고 반문한” 작품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와 ‘신세계’에도 그는 영웅이 아니라 선함과 거리를 둔 인물로 등장했다. 최민식은 “예전 배역들이 세긴 셌나 보다”며 “이번처럼 제 배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명량’은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살신성인의 지도력을 묘사한다.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 감독이 배우와 스태프를 지휘했다. 순수 제작비만 150억원을 쏟아 세계 해전사에 새겨진 전투를 스크린에 재연한다. 조선 수군과 왜군이 갑판 위에서 벌이는 백병전이 백미다. 최민식은 “배우들이 눈가가 찢어지고 발가락이 부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계속했다”며 영화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최민식은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패전에 대한 두려움 등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뚫고 충을 실천한 인물의 고독과 소신 등을 표현”하려 했다. ‘인간 이순신’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장군이 어머니 위패를 집무실에 모시고 있는 설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상영시간은 128분이다. 그리 짧지 않은데 최민식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전투를 보여주기 전까지 감정이 쌓여가는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민식은 “내가 감독이었으면 어떻게든 우겨서 4시간짜리로 만들었을 것”이라며 크게 웃었다.
촬영을 마쳤는데도 그는 “개운치가 않다”고 말했다. 영화를 찍는 내내 “너무나 막막했다”고도 했다. 이순신은, “나랑 비슷한 점이 있어 우쭐하면서도 위안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장승업과 너무 다른 역할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위압감과 존재감을 지닌 분의 실제 음성과 체취 등이 어떠했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가 된 뒤 (실존인물의) 팩트(사실)에 절망하긴 처음이었다”고도 고백했다. “예전 인물들은 상상력을 보태 자유롭게 연기했는데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누가 돼선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너무나 궁금해 미치도록 화가 나기도 했어요. 그분의 눈빛을 정말 보고 싶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명량’의 흥행 성공으로 속편 제작이 추진된다면 다시 이순신이 될 것이냐고 묻자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안 합니다. 이걸 또 해요? 촬영 내내 정말 힘들었는데요?”라는 말에 단호함이 배었다. “김한민 감독이 촬영 중에도 노량해전과 한산도대첩을 묶어 ‘이순신 3부작’ 시리즈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냥 응원만 할게요’라고 농담 어린 답변을 했습니다(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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