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습기자는 곧 사회부 경찰팀 소속을 의미한다. 사흘간의 사내 교육이 끝난 직후 선배에게 처음 들은 말은 “남대문경찰서에 짐 풀어라”였다. 5월 11일부터 경찰서는 나의 일터일 뿐만 아니라 주 활동지요, 서식지요, 집이 됐다. 경찰서를 차례로 방문한다는 의미의 ‘경찰서 마와리’를 도는 견습기자는 낚시 바늘의 역할이라고 했다. 숨어 있는 사건을 낚아채는 것이 마와리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본 경찰서는 모든 게 낯설었다. 형사팀을 찾는 일부터,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또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형사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는 심호흡을 수십 번도 더 했다. 해도 뜨기 전의 새벽, 상대도 나도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든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밤에 무슨 일 있었나요?”가 전부였다. 게다가 언제 만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만 말하는 형사부터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형사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사팀의 문을 여는 데 익숙해지기는커녕 심호흡하는 시간만 길어져 갔다.
그러길 거의 한 달. 평생 잊지 못할 계기가 마련됐다. 세월호 참사 두 달 기획을 위해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파견을 가게 된 것이다.
진도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여성의 시신 한 구가 수습됐다는 속보를 접했다. 진도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DNA 검사결과를 확인하고 희생자의 가족을 만나야 했다. 유니나 교사였다. 딸을 잃은 슬픔에 잠긴 동시에 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할 줄 알았다가 50여 일만에 찾은, 팔에 링거 주사바늘을 꽂은 유 교사의 아버지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형사팀 문을 열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길고 깊은 심호흡이 필요했다.
다음날 발행될 신문을 위해 유 교사가 어떤 딸이었는지, 세월호에 탑승하기 전에 가족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었다. 기자에게 음료수까지 챙겨주는 가족들 앞에서 어떤 말을 더 꺼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안절부절못하던 견습기자는 “이번 사고로 잃은 딸이 효녀였다”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빠의 이야기를 들은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를 전달하는 건 기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다. 나는 진도에서의 첫 인터뷰에서 아무런 ‘새로운 사실’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나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단순히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기사에 그들의 '마음'을 담는 게 가장 큰 목적이 된 것이다. 진도에서의 시간만큼은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새벽 6시, 팽목항에 있는 모든 천막을 돌며 두유를 나르는 실종자의 가족이 있었다. 양승진 교사의 동생이었다. 그 뒤를 따라 다니며 “아버지 체력이 너무 좋으신 거 아니에요?”라고 말을 걸었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얼마나 힘든 마음일지 뻔히 아는데, “심정이 어떠시냐”는 질문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오가는 말들이 가족들의 마음을 들어볼 수 있는 열쇠가 되곤 했다. “이렇게라도 움직이고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가장 한숨을 많이 쉬던 윤민지양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줄담배를 피웠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분이 담배를 피우는 게 걱정 돼 “아버지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시면 어떡하냐”고 말을 걸었다. “나도 예전엔 담배를 이렇게까지 많이 피우진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자 처음엔 기자라면 무조건 경계하던 가족들도 이제는 옆에서 함께 밥을 먹어도 괜찮다고 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딸을 잃은 슬픔에 딸의 시신을 찾은 뒤에도 안산에서 진도까지 다섯 번이나 다시 내려왔다는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는 “배고프다, 같이 야식으로 라면 먹자”며 내 손을 잡아 이끌기도 했다. 김 교사와 평소 심야영화를 자주 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는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딸처럼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두 달 내내 진도에 머무르며 실종자 가족들과 살을 부대끼며 지낸 스무 살 자원봉사자 서지혜씨의 예쁜 마음을 지면에 싣고 싶다고 했을 때 서씨는 몇 번이나 인터뷰를 고사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혹시라도 희생자 가족들에게 누가 되진 않을까 걱정했단다. 서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듣고 싶어 그 옆에서 같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이야기는 기사화되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지혜는 내게 “이제 정들었는데 기자 언니 벌써 올라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팽목항에서 기자는 사람을 만나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물론 기자는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기사까지 써야 하므로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하지만 모든 기사의 바탕엔 기자가 직접 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단 걸 체감하게 된 첫 번째 순간이어서인지, 팽목항에 머물며 자원봉사자와 기자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이 헷갈리는 순간도 있었고, 팽목항을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래도 서울에 돌아온 뒤 다시 경찰서로 향할 때는 발걸음도 마음도 열흘 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는 경찰서에 사건만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곱씹어 보지만 견습기자에게 경찰서는 일터이기에 앞서 활동지요, 서식지다. 기자가 가는 곳 어디든 그렇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단순히 일적인 관계로만 대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오늘 새벽 눈을 뜨면서도 생각했다. ‘오늘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 볼까.’ [견습 수첩]
양진하기자 real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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