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반 동안 냉동실에 묵혔던 곡들을 다시 꺼내 연습하는 중이다. 기억뿐만 아니라 감각의 해동이어서 반갑다가도 예전만 못한 부분에서는 조바심이 난다. 무대에 올렸던 곡이라 빠삭하게 안다 자신하고 있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면이 드러나 낯설기도 하다. ‘그땐 어떻게 이렇게 쳤었지?’ 악보에 표기된 손가락 번호를 일일이 고쳐 적고, 악상의 맥락을 이번엔 완전히 뒤집어 시도해보았다. 그랬더니 지긋지긋하게 푸닥거렸던 곡인데도 스스로 탐닉할 정도로 싱싱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꼭 그렇다. 휴지기를 겪고 나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한 숱한 시행착오들조차 다시 신선한 힘을 얻지 않던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 늘 시도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날이 정말 무더웠다. 선풍기 바람으로 성이 안차 옷을 훌렁 벗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척추를 타고 흘러 내리는 땀방울의 가느다란 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위팔을 스치는 유두의 감촉도 새삼 수줍었다. 척추와 유두의 감각은 그렇게 온몸을 일깨우는 농성을 시작한 셈이었다. 내친 김에 하의까지 다 벗어 버렸다. 이제는 배꼽과 체모가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강력한 포르티시모를 연주할 때마다 배꼽아래 불끈 힘이 일어나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체모는 자유를 얻은 듯 선풍기 바람에 하늘거렸다. 내 몸을 정작 이렇게도 몰랐다니. 실오라기를 걸쳤을 때는 차마 알지 못했던 낱낱의 감각이 기억의 해동과 함께 깨어나던 놀라운 순간이었다. 이제야 몸 대 몸으로 악기와 정직하게 대면한 듯했다. 팬티 고무줄이란 결국 관념의 굴레와도 같은지 몰랐다. 더불어 내 위선의 더께도 벗어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피아노 위에 똑같은 모양의 거울을 3개 나란히 올려 놓았다. 거울가게를 몇 군데 발품 팔아 겨우 찾은 것들이라 날이 갈수록 애착이 생긴다. 대개의 탁상 거울은 동그란 모양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지만, 이 거울은 긴 직사각형에 90도로 완벽히 곧추 세울 수 있어 좋다. 저음역엔 왼쪽 거울, 중간 음역은 가운데 거울, 고음역은 오른쪽 거울, 연습하는 동안 3개의 거울을 넘나들며 내 얼굴을 응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몸 연습처럼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발현인 것이다.
애초엔 건반에 붙박혀 있는 인식과 시선을 끌어 올리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도약을 일삼는 거대한 악절을 만날수록 온 신경은 건반으로 흡착해 버린다. 틀린 음에 착지하지 않으려 몸뚱어리 역시 긴장으로 경직된다. 에너지로 열정을 토해내야 할 악절에서 심리적, 신체적 형편은 정작 소극적이기 십상이다. 용기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더욱 수월하게 태어난다. 연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 음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확연히 목도할 수 있다.
거울은 쇄골까지만 비춘다. 허나 거울 안의 눈빛, 표정, 턱 선의 방향, 쇄골의 균형 등에서 내가 음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낱낱이 점검할 수 있다. 시선의 높이를 건반으로부터 해방시키면, 인식의 지평도 근경에서 원경으로 확장된다. 소극적으로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은 거울 속의 지원군을 통해 적극적인 용기를 얻는다.
거울연습이 나르시시즘의 강화가 될까 우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객관화에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거울 속의 나는 또 다른 관찰자다. 사거리 한복판에 책상을 갖다 놓은 듯 독서했다는 어느 현인의 일화처럼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와 같은 기능도 한다. 순간에 머물지 않고, 2초 후를 예비하는 표정을 대할 때 가장 반갑다. 거울로부터 반사되는 눈빛을 보면 찰나에 탐닉하고 있는지, 아님 전체적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변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가볍고 익살스런 악절에서 심각한 울상을 목도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땐 음악적 내용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표정들을 생략해 나가야 한다. 음악의 방향과 어긋나 있는 몸통의 기울기를 교정하면서 주관에 매몰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 어쩌면 거울 속 나는 결국 인식의 발현일지 모른다. 어느새 두껍게 굳어버린 페르소나의 가면을 투명하게 벗어 던지고 싶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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