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폭력은 동체다. 증오는 군의 동력이고 목표는 타자 배제다. 집단 안팎의 생리가 다르기 어렵다. 군에 의해 인간은 오염된다. 반면 우파 논리는 감염자가 군을 더럽힌다는 거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군내 구타는 한국군에서 거의 밥 먹는 일과 맞먹을 정도의 일상이었다. (…) 대체로 지휘관인 장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체한다. 이들은 “부대가 잘 돌아가기 위해” 군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임병들의 일탈적 행동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격려하기도 한다. (…) 언로가 완전히 막힌 폐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그 어떤 비인간적인 일들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고, 대한민국 남자들은 이런 조직에서 훈련받은 뒤 사회에 나와서도 권력에 순응하는 ‘비굴한 시민’이 된다. 이명박 정부의 ‘전투형 부대’ 육성 정책으로 군은 완전히 과거로 되돌아갔다. (…) 경쟁과 스트레스에 주눅들어 있고, 공감능력이 매우 약한 지금 청년들은 이 꽉 막힌 조직에서 점차 ‘괴물’로 변해갔다. 이념과 철학이 없는 군대, ‘애국’은 오직 구호뿐이고 실제로는 출세에만 관심 있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 외의 수단은 없다. (…) 겉으로 보건대 과거의 구타가 고참병에 의한 일방폭력이었다면, 이번의 경우는 동료들의 ‘과도순응’에 의한 집단폭력의 성격이 강하고, 잔혹행위에 대해 집단 내의 자제력과 견제력이 상실된 도덕 진공 혹은 해체, 즉 인간 사회의 기본인 ‘차마 그렇게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완전히 사라진 병리 사회의 지옥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과거 베트남전쟁 말기 미군들이 동료들에게, 일본군이나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할 때 보여준 모습과 유사하다. 이 모두가 이념 없는 전쟁 혹은 비인간적 군 조직 하에서 인간성을 부인당한 사병들이 상관 대신 약자인 동료와 민간인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사로잡힌 병사들이 약자인 하급자에게 화풀이하는 현실, 이런 조직을 만든 사람은 그들이 아니므로, 이들 모두가 희생자다. (…) 사실 이런 비인간성과 잔혹성은 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돈 없는 약자들이 살아가는 모든 현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매일 진행되고 있다. (…) 약자들 간의 잔혹성은 바로 강자들이 평소 그들에게 가르쳐준 것들이었다. 괴물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이 국가와 사회다.”
-누가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나?(한겨레 기명 칼럼ㆍ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전문 보기
“윤 일병 구타사망 사건으로 뭇매를 맞고 있는 군(軍)은 북한군이 아니고 바로 우리 군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바로 우리 군이다. (…) 윤 일병 사건을 놓고 여당 실력자, 여야 정치인, 언론 할 것 없이 군을 통타한다. 군 통수권자인 박근혜 대통령도 가해자와 방조자를 일벌백계하라며 서슬이 푸르다. 그렇게만 하면 복잡한 요인이 얽히고설킨 사고를 근절할 수 있을까. (…) 우리 군은 평시 안전만 지키는 약군(弱軍)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길 강군(强軍)이어야 한다. 그런데 군기(軍紀)를 둘러싼 정치적 포퓰리즘이 오히려 군의 위기, 안보의 위기를 키우지는 않는가. (…) 장교들이 휘하의 안전사고 때문에 진급을 못할까봐 사격훈련을 줄이고, 탄피 반납용 소모사격을 시킨다면 그런 군은 위기다. (…) 노무현 정부가 서울 남성대의 특전사를 헐어 아파트를 짓기로 했고, 이명박 정부가 이를 실행해 특전사는 경기도 이천으로 밀려났다. 그 덕에 20만 병력의 북한 특수부대는 서울 심장부 타격의 골든타임을 최소 1∼2시간 더 벌게 됐다. 작전은 10분이면 ‘상황 끝’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복무기간이 10년인 북한 병사와 이미 21개월로 짧아진 우리 사병의 일대일 전투력은 프로와 아마추어 차이가 아닐까. (…) 저출산과 복무기간 단축이 맞물려, 장기적으로 50만 병력이라도 유지하려면 병력자원이 남아돌던 과거처럼 우수자원만 골라 입대시킬 수도 없다. (…) 결국 북한군은 프로 11명이 뛰고, 우리 군은 아마추어 8명이 뛰는 축구를 연상케 한다. (…) 군기와 병사의 사기(士氣), 그리고 인권(人權)은 다 중요하다. (…) 군기 세우기와 인권 침해는 별개의 차원이다. (…) 군대 문화는 사회 문화의 연장이다. 군대 밖에서는 온갖 강력·인신범죄가 끊이지 않는데, 군대만은 그런 것이 전무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구조적 요인들을 살피지 않고 그저 무사고만 강요하면 상급자가 하급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군기가 더 해이해져 군기사고의 위험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우리 軍이 우리다(동아일보 기명 칼럼ㆍ배인준 주필) ☞ 전문 보기
방역의 기본은 격리다. 공익은 인권을 파묻는다. 하지만 모두의 이익이란 건 없다. 포장된 야만이기 십상이다. 불안이 가면을 벗긴다. 에볼라 공포 뒤에 인종주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덕성여대가 지난 4일부터 유엔 여성기구(UN Womem)와 공동으로 개최한‘제2차 차세대 여성 글로벌 파트너십 세계대회’에 나이지리아 학생들의 참가를 막아 파문이 일고 있다. 행사 개막을 앞두고 전해진 서아프리카 지역의 에볼라바이러스병 확산 우려 때문이다. (…) 감염 여부를 잘 검사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학 관계자에게 물었다. (…) 그는 감염 됐든 안 됐든 나이지리아 학생이 참가해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행사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는 듯했다. (…) 권준욱 보건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은 기독교방송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병지역에서) 국내에 들어오는 분들이 있다면 검역을 통해서 발열감시 등을 진행하는데 에볼라가 다행스러운 것 중 하나는 증상이 없을 때는 전파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무증상일 경우는 안심해도 되고 일단 증상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체액, 주로 혈액에 노출돼야만 감염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감염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발병국) 현지 공항에서는 출국하는 사람들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의 협조로 검역 및 스크리닝을 하고 증상이 있는 분들은 일단 나오지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 게다가 나이지리아는 각국이 여행자제 경보를 내린 3개국과 몇 개 나라 건너에 있다. (…) 나이지리아 학생 몇이 오는 바람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행사가 차질 빚을까 대학 당국은 조마조마했을 것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결정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 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에게 한국 사정을 이해시켜 자진해서 오지 않도록 하는 게 맞다. 그 학생들에게서 “유엔 인권위원회 제소”라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 나이지리아 학생들에게 그건 어처구니 없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근거 없는‘집단 불안’과 ‘인권 경시’에 젖어 있다는 것을 이번 사태로도 새삼 확인한다.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에볼라가 아니라 이런 후진적인 인권 감각이다.”
-에볼라와 인권(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김범수 국제부장) ☞ 전문 보기
“많은 사람은 바이러스가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게 할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보통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종족의 번식을 목표로 한다. 우리가 다른 생물을 먹고 살듯이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에 기생해야 하며, 그 과정에 어쩌다 보니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병들거나 죽게 되는 것이다. (…) 에볼라 바이러스는 사람이라는 숙주를 이용해 종의 확장을 꾀하지만, 한꺼번에 피고 마는 종이라 숙주를 죽이고 만다. 마침 공기를 통한 전파도 안 되고 체액이나 분비물, 혈액 등을 직접 만져야 전파된다.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 특정 지역에만 살고 있었고 생존 영역을 확장하지 못했다.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1976년 콩고에서 첫 발견이 이뤄졌지만, 40년 가까이 방치된 이유이다. 이런 에볼라 바이러스를 사람이 전면에 등장시켰다. 비행기 등 각종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영토 확장에 관심이 없는 종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에볼라 유행 지역이 아닌, 유행국 주변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칫 아프리카 사람 혹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격리당해야 하고 기피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에볼라가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곳에서 생겼으면 어땠을까? 예방백신이나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하지 않았을까? 에볼라에 걸린 환자를 차별하거나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국을 금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았을까? 이미 우리는 한 지역에만 존재하던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질 수 있는 ‘지구촌’에 살고 있다. 내전과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에볼라에서 구해내는 것이 우리도 그리고 아프리카 사람들도 함께 사는 길이다.”
-40년 방치된 에볼라(한겨레 ‘한겨레 프리즘’ㆍ김양중 의료전문기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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