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경기 고양 일산 버스터미널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로 5명이 사망했고 20여명이 부상했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사고라 현장으로 달려가는데 마음은 더 착잡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일산 백병원. 부상자 상태와 신원을 파악해 선배에게 보고하던 중 한 젊은 여성이 오열을 하며 달려 나갔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른 병원으로 후송돼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 것이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택시를 타러 가기까지 그녀는 몇 번이고 비틀거렸고, 남자친구가 그녀를 부축하며 겨우겨우 걸음을 떼고 있었다. 지켜보던 병원 관계자, 취재진 모두 이 먹먹한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사고 발생 다음 날. 빈소 취재 지시를 받았다. 당혹스러웠고 두려웠다.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이를 한 순간에 잃은 사람들이다. 어찌 감히 그들에게 위로랍시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빈소에 도착해서 수십 번을 망설였다. 심장이 두근거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그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5분, 10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마음은 초조해졌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기자로서 지금 이 순간 유가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리라, 그들 또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애써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 빈소로 들어갔다. 일단 조문부터 했다. 그리곤 고인의 상주인 남편을 향해 돌아섰다. 누구냐고 묻는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아… 저는, 저는 한국일보 김진주입니다.” 남편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내 손을 잡고 “우리 딸아이가 기자님과 비슷한 또래일 것 같다”며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터미널 매표소 직원으로 일했던 고인이 사고 당일엔 “오늘 하루 일하면 이틀 쉰다”고 좋아했단 얘길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의 씁쓸한 미소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내가 보고 싶다”면서도 “일단은 멀리 여행 갔다고 생각하고 살려 한다”던 대목에선 눈물을 삼키기 위해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러던 중 고인이 119 최초 신고자 중 한 사람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터미널 직원이었기에 건물 구조를 잘 알고 있던 그녀였음에도 매표소에서 신고를 하다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유가족들은 “2~3분이면 탈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탈출하지 못했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내용을 기사에 충실히 반영했으면 하는 마음에 선배에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했다.
며칠 후 고인의 발인 날. 다시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 들어가는 게 망설여지는 건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발인이란 건 유가족들이 고인을 정말 떠나 보내는,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취재를 위해 들어간다는 것이 너무도 염치없었다. 빈소 취재까지 허락해 주셨으니 인사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일단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나를 본 유가족들이 먼저 다가와 거듭 “고맙다”고 한 것. 내 손을 움켜쥐며 “기사 잘 봤다. 우리 언니 얘기 잘 전해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유가족 앞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때가 떠오를 때면 여전히 눈물이 고인다. 어쩌면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잊지 못할 장면 중 하나로 남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빈소까지 쫓아가 유가족을 취재하는 기자를 더러 ‘기레기’라고 욕한다. 하지만 기자는 기자로서 다른 이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유가족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난 몸소 깨달았다. 기자라는 이름을 내려놓을 때까지 이 마음, 이 깨달음을 잊지 않겠다. [견습 수첩]
김진주 pearl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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