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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내야 물러날 것인가

입력
2014.08.0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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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이 선임병 구타로 사망했을 당시 국방부 장관은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다. 군 수뇌부가 사건을 축소ㆍ은폐한 것으로 볼 만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김 실장은 “최초 보고 후 수사 결과에 대한 추가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사표를 낸 권오성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리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실장이 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이 선임병 구타로 사망했을 당시 국방부 장관은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다. 군 수뇌부가 사건을 축소ㆍ은폐한 것으로 볼 만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김 실장은 “최초 보고 후 수사 결과에 대한 추가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사표를 낸 권오성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리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실장이 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무지는 무능이다. 문책 사유다. 무슨 염치로 면책을 바라나. 집착을 낳는 건 미련이다. 출세길은 가팔랐다. 높은 곳이 낙폭도 크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리다. 쫓아내야 물러날 텐가.

“28사단의 윤일병이 쓰러진 날은 4월 6일이었다. (…) 진실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으니 내 책임만 피하면 그만이라는 사고가 정부에 만연해 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이 이 사건을 보고받은 것은 4월 8일이다. 국방부 발표를 그대로 믿어서 그가 상세한 정황은 몰랐다고 쳐도 ‘군대 내 폭행에 따른 사망사고’로 보고받은 것은 분명하다. (…) 당시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병역의 의무가 있는 국가의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징집한 병사의 폭행 끝 사망을 가벼이 여겼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져야 한다. (…) 그런데도 김관진 안보실장에 대한 책임론에 청와대의 반응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참모총장이 사퇴했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건을 넉 달 가까이 은폐했고 군인권센터라는 민간단체가 전모를 폭로하지 않았으면 현재까지도 진상이 드러났을까 의심을 주는 정부답게 무책임하고 뻔뻔하다. (…) 어떤 사건이든 재발을 막는 방법은 명확하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책임자에게 분명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고위직일수록 그 책임을 무겁게 해야 한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면 본질에 접근은 하지도 않다가는 위원회 만들고 보고서 만들고 1차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을 덮어버린다. 윤일병 사망사건에는 이병장을 비롯한 가해자 6명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만 따진다. 어떻게 집단의 가해가 그렇게 조직적으로 계속 일어날 수 있는지, 누가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는지, 왜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했는지 진짜 책임져야 할 고위 책임자들은 ‘모른다’ 한마디로 책임을 피한다.”

-‘몰랐다’는 통하지 않는다(한국일보 기명 칼럼ㆍ서화숙 선임기자) ☞ 전문 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책임을 묻겠다. 책임질 사람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바로 그날 육군참모총장과 경찰청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 결국 두 명은 옷을 벗고, 세상 여론으로는 "더 책임 있다"고 보는 '윤 일병 사망 사건'의 국가안보실장(당시 국방장관)과 '유병언 사건 부실 수사'의 검찰총장은 그대로 있다. (…) 하지만 대통령이 “책임질 사람의 책임과 일벌백계”를 천명한 이상 국가안보실장과 검찰총장도 똑같이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 맞다. (…) 이번에 물러났거나 거론되는 당사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자신의 직접적인 잘못이나 과오가 아니더라도 대신 책임을 떠안고 가야 할 경우가 있다. 그게 부당하다면 당초 그 자리를 사양했어야 옳았다. (…) 오랜 직업적 관찰에 의하면 떠나야 할 시점에 제 발로 떠나지 못하면 나중에 초라한 모습으로 질질 떠밀려가기 십상이다. 이는 결국 자신의 문제로 대통령과 정권 전체에도 부담을 준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적인' 진퇴 결정은 중요한 것이다. (…)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대통령이 질책하기 전에 각료와 참모들이 먼저 책임을 느껴야 한다. 어떤 위기 상황에 직면해 “이는 내 선에서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정부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서로 피하다 보면 마치 ‘보루(堡壘)’가 허물어지듯 결국 대통령의 코 앞까지 ‘책임’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발언해야 자신의 설 자리와 떠날 자리를 따져보는 이상한 풍조가 생겼다.”

-사의 표명도 눈치를 보나(조선일보 기명 칼럼ㆍ최보식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증오는 주체다. 스스로 객체를 선택한다. 유대인 디아스포라(離散)는 증오의 결과였다. 방랑 민족은 피해자 서사를 썼지만 고토 탈환 뒤 가해자가 됐다. 그들 의지가 아닌지 모른다.

“1656년 7월2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교 회당에서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는 바뤼흐 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고 비난한다. (…)” 23살 먹은 젊은이를 파문한 암스테르담 유대인 공동체는 애초 스페인에서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이었다. 15세기 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스페인은 유대인이라는 이물질로 눈을 돌렸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추방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 불관용에 쫓긴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갔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당했던 유대인들이 한 생각 깊은 젊은이를 찍어내 축출한 것이다. (…) 유대인 공동체는 스피노자를 유대교 신을 부정하는 불온한 자로 몰았다. 스피노자를 파문한 글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동체의 견딜 수 없는 증오심을 드러내고 있다. (…)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놀이터를 때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놀던 어린아이들이 떼로 죽었다. (…) 왜 아이들을 죽이는가? 혹시 이것은 의도된 것이 아닐까? (…) 증오전쟁은 군인과 민간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아이는 미래의 어른이니 미리 씨를 말려야 한다. 나치 독일이 바로 그런 범죄형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원수를 닮아가고 있다. 가자 학살 작전을 국민 80%가 지지하는 이 끔찍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공동체 전체가 유죄다.”

-스피노자, 가자, 예언자(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각각 강력한 서사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듯이 성경학교도 그 나름의 서사로 아이들을 매혹시켰는데, 그것은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된 영웅담이었다. 주변에서는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영웅을 갈망하던 소년들에게 성경 영웅담은 교회를 찾는 강력한 유인이 되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여호수아와 다윗과 솔로몬은 광개토왕과 이순신과 세종대왕 못지않은 영웅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유장한 민족 서사가 있었다. (…) 우리 민족의 영웅들이 외적으로부터 민족을 방어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인지, 여호수아 같은 공격형 영웅에게서는 색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 놀라운 점은 여름성경학교에서 들은 이야기를 현실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모세의 이집트 탈출을 재현하듯, 나치에게 홀로코스트의 시련을 겪은 후 유럽을 빠져나와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주변 아랍 세력과 전쟁을 벌였고, 1967년 벌어진 3차 중동전쟁에서는 단 6일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인구 400만의 이스라엘이 인구 1억의 아랍연맹에 승리를 거둔 이 전쟁은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의 재현이었다. (…) 만일 이 시점에서 성장이 멈추었다면 소년은 정신으로는 이스라엘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자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이스라엘 국민 87%에게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소년은 여름성경학교 시절 이후 이스라엘 영웅 서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쓰디쓴 여름을 숱하게 맛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의 무리가 원주민에게는 외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칼날을 휘두르는 자리에서 칼날에 베이는 자리, 총을 쏘는 자리에서 총에 맞는 자리로 옮겨가 보고,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패자의 서사, 아니 승패를 넘어서는 새로운 서사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여름성경학교(8월 2일자 중앙일보 ‘삶의 향기’ㆍ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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