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후 국경선 비극의 서막… 소수가 다수 지배 정치 왜곡 조장
2003년 美 침공으로 악화, 2등 국민된 수니파 권력 투쟁 시작 시리아 반군과 결합
이라크 사태 해법은 美 이해관계 떠나 종족·종파 대통합 이끌 정부 세워야
이라크 사태가 미군의 공습까지 가세해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 사태는 시리아 내전의 반군 강경세력으로 급성장한 무장단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가 지난 6월 이라크 제2도시인 북부 모술과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수도 바그다드를 압박할 정도로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한 ISIS는 급기야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잇는 영토에 이슬람국가(IS) 수립을 선언했다. 정치ㆍ종교 권력을 함께 가진 이슬람 지도자를 일컫는 칼리프 통치 국가를 세운 이들은 이라크 정부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주요 언론들이 명칭조차 달리 표기할 정도로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다. 미군 철수 후 안정 궤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일어난 이들의 강력한 군사행동으로 서방 세계가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동 정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 이번 사태는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 4년간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계속된 시리아 내전으로 이라크 국경지대는 사실상 치안 공백상태였다.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도 부족과 종파 통합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통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시리아 국경지대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시아파가 집권하고 있는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여온 수니파 급진세력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급조된 오합지졸의 이라크 정부군은 약간의 애국심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패주했다. 이 지역의 쿠르드족들도 이라크 중앙정부가 약화된 틈을 타서 독립국가를 수립할 심산으로 IS의 진군을 막지 않았다. 불과 2주 만에 바그다드 북쪽은 수니파 반군들의 점령지가 돼버렸다.
이라크 전쟁이 불행의 씨앗
1932년 이라크는 아랍, 쿠르드, 투르크멘, 수니파, 시아파라는 다양한 종족-종파적 그룹을 묶어 독립했다. 중동을 식민 지배한 영국과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종족과 종파적 차이와 분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그은 국경 책정의 결과였다.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레바논에서는 다수 이슬람을 억압하기 위해 소수인 기독교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기까지 했다. 또 시리아에서는 소수 알라위파가 다수 수니파를,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으로 대표되는 소수 수니파가 다수 시아파를 지배하는 왜곡된 정치구조를 조장해 왔다.
후세인의 독재에도 그나마 유지되던 여러 부족과 종파간의 느슨한 연대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산산조각 났다. 이라크 국민들의 삶은 자국민을 화학무기로 공격해 아랍권에서도 비난 받던 후세인 정권 당시보다 장밋빛 꿈을 약속했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후 상황이 더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당시 미국의 혹독한 경제제제 속에도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던 절대다수 국민들은 이라크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었고, 초토화된 의식주 공급체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국민들은 무엇보다 물과 전기를 위해 매일 생존투쟁을 벌였다. 국립 도서관은 미군 폭격에 불탔고, 박물관은 방치된 채 습격 당했다.
10년간 끔찍한 폭탄테러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명을 끈질기게 위협해 왔다. 미국이 세운 새로운 이라크 정권이 역사적 앙갚음을 위해 후세인 시절의 군과 경찰을 강제로 해산시키며 많은 무기들이 고스란히 쫓겨난 군경의 손에 들어간 탓이다. 모든 권력에서 밀려나 2등 국민 신세가 된 이들의 극단적 반발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 중 한 그룹이 모술 장악을 주도한 수니파 반군 무장세력인 IS다.
종파 분쟁과는 다른 이라크 사태
수니파와 시아파는 종파라기보다는 정파로 출발했다. 이슬람세계는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자 논쟁에 휩싸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혈통이던 사위이자 사촌 동생 알리가 기대와는 달리 후계자인 칼리프가 되지 못했다. 655년 알리가 겨우 네 번째 칼리프가 되었으나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추종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의 기득권을 다투고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자 지금 이라크 쪽으로 이주해 가서 시아파가 됐다. 메카에 남아 있던 세력들은 수니파가 되고 스스로 정통을 자처했다. 더욱이 680년 알리의 장남 하산이 독살 당한 후 둘째 아들 후세인 마저 수니파 아랍정권에 살육 당하자 두 세력은 정치적 적대관계가 됐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라는 한 우산 아래 느슨하게 연대해왔지만, 사사건건 충돌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 무슬림들 사이에서 수니-시아는 서로 사업파트너로 통혼이 가능하고, 한 모스크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한 관계다. 시리아 내전에서 시아파 소수정권이 수니파 다수 국민을 차별하고, 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미국이나 이라크 시아파 정부가 수니파를 압박하고 권력에서 배제하면서 수니파의 불만이 커진 것이다. 저항세력이 종파문제라는 매력적인 도구로 수니파를 부추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이라크 내전을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고질적인 종파분쟁으로 봐서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현상으로만 보면 수니-시아간 갈등으로 비춰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본질은 반민주적 독재에 고통 받고 있는 권력에서 소외된 세력들의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다. 물론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는 부족주의나 권력 투쟁과정에서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무시해도 곤란하다. 더욱이 효율적인 정치적 무기가 없는 급진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반미 선동이나 종파적 편들기에 호소하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권력 갈등이 사태의 본질
현재 아랍 민주화 시위,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분쟁 등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전쟁의 본질은 권력 갈등이다. 또 종파분쟁의 성격보다는 부족주의, 영토문제, 나아가 의식주와 안전망 확보라는 민생 문제가 도사린다. 종파 분쟁이 내전의 본질이라면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해 수니파 후세인을 몰아내고 가장 강력한 시아파 반미집단인 이란 바로 옆에 또 다른 시아파 정권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시아파라는 종교적 연대보다는 아랍과 페르시아라는 부족적 적의감과 역사적으로 아픈 기억, 개별국가 이익 우선이라는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향후 이란은 자국 보호와 국경지대 안전망 확보를 위해 이라크 반군을 격퇴하려는 정책을 펼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웃 터키도 수니파라는 이유만으로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IS는 일부 수니파 국가에서도 반이슬람적 테러 조직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내전 상태의 혼란이 계속되며 중동질서 재편의 신호탄이 점차 가시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부족과 종파, 친미와 반미, 역사적 트라우마와 자국이익 계산법에 따라 전혀 새로운 양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혼란 속에서 생겨난 정치적 공백을 이용해 급진주의자들이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에 IS를 선포했고, 이는 35년간 가장 강력한 반미선봉에 섰던 이란이 미국과 화해를 모색하면서 이라크 반군 척결에 군사협력하는 단계까지 진전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이란의 화해무드에 위협을 느끼고, 이란 견제 강화와 함께 필요하면 이스라엘과도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웃 터키와 아랍 산유국들도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분주히 주판알을 튀기고 있다. IS의 등장으로 위협세력이 하나 더 늘어난 이스라엘은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무차별 폭격하면서, 위협 요소 하나를 제거하려는 위험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라크 사태를 해결하고 전반적인 중동 안정화를 가져오려면 미국이 현 이라크의 알 말리키 정권을 교체하고 진정 민주적인 방식의 이라크 정권 재창출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새 정권의 가장 큰 목표는 종족과 종파적 분열의 대통합이어야 한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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