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테 인간은 해결사 노릇을 바란다. 교황은 대리자다. 하지만 모든 기도가 다 이뤄질 순 없다. 경합ㆍ모순 탓이다. 정작 이 필연을 어찌 극복할지 가르치는 게 종교의 구실 아닐까.
“어디를 가든 늘 첫 번째 요구사항이 ‘작은 방과 작은 자동차’라는 교황의 ‘프란치스코식 비정상의 정상화’는 화제가 됐다. 해외 순방 때 짐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교황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답했다. “그게 정상이죠. 우리는 정상적인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거창한 몸짓이나 대단한 말이 아니라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때문”이라는 이병호 주교의 글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가장 큰 것으로도 가둘 수 없지만 가장 작은 것에 담겨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다운 것”이라는 예수회 설립자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 묘비명은 교황이 즐겨 인용하는 금언이라고 한다. 큰 울림을 가져오는 건 역시 작은 것들이다. 교황의 인기가 높다 보니 한국에 오는 교황에게 기대어 목소리를 내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서로 교황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것 같다. (…) 교황은 ‘해결사’가 아니다. (…) 교황이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기보다 무슬림의 발에 기꺼이 입 맞추고, 예수회 소속이면서도 ‘경쟁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의 성자를 교황명으로 택한 화해와 용기에 주목하면 좋겠다.”
-가장 작은 것에 담겨지는 것(동아일보 ‘광화문에서’ㆍ강수진 문화부장) ☞ 전문 보기
“조선은 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과 함께 비대해진 양반계층의 걷잡을 수 없는 탐욕과 부패, 붕당화로 마침내 국가 공동체 전체가 해체될지도 모를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 이런 위기의 시기에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일단의 유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새로운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 소외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극한에 이른 정신적 공허함을 채워가는 길이란 확신이 이들을 새로운 세계로 눈 돌리게 만들었다. (…) 그렇게 희생된 이들을 시복하기 위해, 200여년이 흐른 뒤 그들이 옳았음을 세계에 선포하기 위해 교황은 한국을 찾았다. (…) 18세기 후반 조선의 위기에 서학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사유와 체제에의 열망을 일깨웠던 그 시간이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움을 향한 싹으로 트이기를 바란다면 무리한 요구일까. 분명한 것은 그 새로움은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적 체제와 물질 만능의 사조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이들의 삶이, 그들의 생명과 실존이 존중받는 새로운 문화와 사회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그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독재를 경고하고,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물질만능의 문화와 사회에 거침없이 맞서고 있다. (…) 그것은 결코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는 어떤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계,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 지금 아파하고 죽어가는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죽어가는 마음, 그래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자는 새로운 복음화의 강력한 권유이다. (…) 그의 행동과 가르침이 인간다움을 이룩하고,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삶의 표징으로, 우리 사회와 문화가 정신적 새로움으로 향해가는 엄중한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의 시대적 의미(경향신문 ‘시론’ㆍ신승환 가톨릭대 교수(철학))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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