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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인파가 교황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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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인파가 교황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입력
2014.08.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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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가까운 몸짓들 광화문 광장 전체에 맑게 씻긴 경건함이…

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인

“광화문은 /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 미당의 시 ‘광화문’의 한 구절이다. 시의 내용대로라면 광화문은 ‘온 하늘에 넘쳐흐르는 푸른 광명’으로 가득 찬 영원성의 공간이다. 이 영원성은 ‘시정의 노랫소리도 태고의 적막’ 속으로 가라앉게 할 만한 고적미를 뽐낸다. 그러나 한껏 추켜올려진 아름다움에 지상의 고단한 삶이 거처할 다락은 없고, 지난했던 세월 이 땅의 민초들이 겪은 역사적 상처를 다감하게 보듬어줄 틈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시복식이 있던 날 광화문은 미당이 노래한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소슬한 종교’로 거듭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 미사는 제대가 마련된 성소가 역사적 희생의 공간임을 가장 먼저 각인시켰다. 무엇보다 붉은 제의와 영대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떠올리게 했고, 왼쪽 가슴에 나비처럼 붙어있는 노란 리본은 망각의 바다 속에 다시 한번 침몰 당할지 모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었다. 순교와 희생이 이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 잃은 시기의 고통과 민주화 운동 시기의 산화한 넋들, 그리고 오늘도 광장 어느 귀퉁이에선가 타오르고 있을 촛불을 교황은 잊지 않았다. 순교자들과 희생자들 사이에서 광화문의 ‘빛’은 그렇게 어떤 초월적 지평으로 훌쩍 솟구쳐 오르는 대신 지상의 낮고 어두운 자리를 찾아 하강하는 자의 겸허한 표정을 시종일관 잃지 않고 있었다.

역사적 시간이 지닌 아픔을 품고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감격은 그 자체로 우리를 들어올리는 매우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이 경험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10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든 이 어마어마한 인파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록 광장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먼발치에서나마 두 손을 모으고 불편한 자세를 몇 시간째 기꺼이 감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특정 종교 공동체의 열기로만 이해할 것인가. 가히 ‘교황 신드롬’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전세계를 휩쓰는 이 열풍은 어쩌면 세계의 비참과 불행에 대한 착잡한 반증인지도 모른다. ‘빈자와 약자의 편’이라는 교황을 통해 우리 시대의 결핍과 고통이 호소되고 있다면, 지금-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감수성은 ‘완전한 행복이 있는 천국에서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광경을 본다면, 누가 과연 천국의 행복감을 느끼겠습니까? 지옥이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에 어떻게 천국이 같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지구 저쪽 끝에서 사람이 사람의 손에 죽으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도저한 자기 부정과 성찰을 거부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닮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린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중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가 있다. 새에게까지 복음을 전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그의 부인이라고 칭할 만큼 청빈을 신앙적 명령으로 삼고 살았다. 수도생활을 한 첫 순간부터 죽기까지 수도복 한 벌과 끈, 바지 한 벌이 그의 전 재산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의 신비를 나는 감히 자신을 모두 비운 자가 누리는 영광과 평화의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그는 청빈의 배우자가 됨으로써 새로 상징되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까지 뛰어넘는 자유를 누렸다. 이 토대 위에서 그는 무소유를 실천하며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였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소서 //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 내 주여 받으시옵서소 /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그가 남긴 ‘태양의 노래’에 담긴 모든 사물과 다감하게 교감할 줄 아는 이 우주적 감성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성스러움의 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의 삶과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기도를 하고 찬미를 하고 싶어진다. 두 손을 모으면 흐트러진 마음도 한 군데로 모아질 것 같고, 겸허히 머리를 숙이면 떨어져 있던 가슴과 머리의 간격 역시 그만큼 좁혀질 것 같다.

누군가는 길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았고, 스마트폰을 치켜들고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아이를 목말을 태운 채 서 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였는데도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침묵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몸짓들이다. 광화문 광장 전체가 하나의 성전으로 바뀐 듯 맑게 씻긴 경건함이 감돈다. 나도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는 새처럼 까치발을 하고 광장 안을 들여다본다. 지금 이 순간과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모두가 온몸으로 골똘하다. 인왕과 북악도 귀를 기울이고 있고, 나무도 돌도 저마다의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미사가 끝나는 대로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기념 전시 중인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앞에 서있을 것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광화문’이 잠시나마 역사 위에서 영원을 살고자 하는 자들이 세운 ‘빛’의 사원이었음을 기억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사 123위' 시복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사 123위' 시복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카 퍼레이드를 하며 신자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카 퍼레이드를 하며 신자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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