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사장들은 매주 수요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일제히 모인다. 수요 사장단회의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CEO간 필요한 의견들을 나누는 자리다.
20일 열린 수요 사장단 회의에서는 김한얼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가 초빙돼 강연을 했는데 소재가 독특했다. 바로 범선과 증기선이다. 19세기 초반 출현한 증기선은 획기적 기술로 주목을 받았지만 범선을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기술의 한계로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없어 주로 내륙 운송에 치중했고, 원거리 해양 운송은 여전히 돛을 펼쳐 바람을 안고 항해하는 범선의 몫이었다.
그렇다 보니 범선에 의존한 운송업체들은 증기선의 출현을 무시했다. 하지만 바다를 주름잡던 범선들은 한 세기만인 20세기 초반 몰락하고, 그 자리를 고스란히 증기선에 내주었다.
결국 김 교수가 강연에서 강조한 메시지는 지금 시장을 호령하는 1등기업들이 그만 못한 작은 기업들의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를 들고 나왔을 때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1등이라는 자만에 빠져 성공 시각으로만 시장을 바라보면 결국 새로운 성장 기회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공교롭게 삼성은 지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2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7조2,000억원을 기록했을 때 시장에서는 삼성이 성장 한계에 부딪친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중국에서 후발주자인 중국업체들의 추격을 받아 스마트폰 재고가 쌓이고 유럽에서 스마트폰의 점유율을 늘리지 못한 것이 2분기 영업이익으로 나타났다.
삼성의 계열사 사장들은 이번 김 교수 강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김 교수는 추가로 코닥의 사례를 들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필름 시장의 1위 업체였던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도 가장 먼저 개발해 내놓았다. 하지만 탄탄한 필름시장의 1위 업체라는 자부심이 디지털 카메라를 등한시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영리하게 파고 든 업체가 일본 소니였다. 소니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으로 축적한 전자업체의 기술력을 디지털 카메라에 응집시켰고, 그 결과 단기간 내 코닥의 디지털카메라에서 불편했던 사항을 보완한 디지털 카메라를 내놓으며 시장을 장악했다. 코닥은 필름에 집착한 아날로그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디지털로 넘어가는 근본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끝내 회사가 도산하는 파국을 맞았다.
이날 강연 주제는 특별히 삼성이 처한 상황을 감안한 의도적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사장들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얘기로 받아 들였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뿐 아니라 기업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야 될 사항에 대한 일반론적 얘기였다”며 “하지만 끊임없이 성장과 도전을 고민해야 하는 사장들 입장에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강연이었다”고 전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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