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영화가 쏟아진다. 영화에 대한 기사는 더 넘쳐난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어반복성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일보 문화부의 라제기ㆍ고경석 기자가 영화 소식을 남다르게 전하기로 했다. 신문 지면의 한계를 넘어 영화를 주제로 수다를 떨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이 개봉 영화 뒤의 숨은 이야기를 편안한 대화로 풀어낸다.
▦라제기(라)=‘명량’의 흥행이 참 놀랍다. 이 정도까지 흥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고경석(고)=올해 여름 나온 한국 영화 네 편 중 흥행이 가장 잘 되겠다 싶었는데 이리 잘 되리라곤 생각 못했다. 여름 영화로서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있는 반면 서사가 헐거워서 과연 관객이 이순신 캐릭터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잘 알려진 인물이라 다들 쉽게 몰입한 것 같다. 700만~800만 정도 흥행할 것이라 예상했다.
▦라=영화가 투박하다고 생각했는데 터질 수 있겠다는 느낌은 있었다. ‘명량’ 관계자를 만났는데 독도와 축구 한일전을 예로 들면서 흥행은 분명히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더라. 하지만 경쟁작들이 워낙 많아서 1,000만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2등으로 ‘명량’을 바짝 따라갈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시장을 나눠먹을 것이라고 봤다. ‘군도: 민란의 시대’가 3등으로 꿋꿋이 버티며 상영될 줄 알았는데 ‘명량’이 개봉하자마자 확 꺾였다. ‘군도’가 600만명 정도는 될 것 같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라=‘명량’이 일명 ‘국뽕영화’(애국심에만 호소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말이 개봉 초반에 나오기도 했다.
▦고=개봉 초반에만 그런 말이 나오고 이후에는 나오지 않아 좀 뜻밖이었다. 아무래도 애국심은 부수적인 흥행 효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라=‘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100억원을 벌게 됐다는 보도가 나와 화제가 됐다.
▦고=김 감독은 부풀려진 금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600만 관객을 잡아도 총매출액이 1,200억원 정도이니 제작을 겸한 김 감독에게 100억원 정도가 돌아가지 않을까.
▦라=추산을 하면 그 정도 금액이 가능한데 김 감독 입장에선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보너스 또는 러닝 개런티를 고려해서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고=이래저래 수익에서 제하는 비용도 많고 제작사와 투자사가 수익을 나누는 비율도 워낙 제각각이라 정확하게 알긴 쉽지 않다.
▦라=김 감독이 촬영기간에 몸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하더라. 이순신 장군이 갈대밭을 아들과 걷는 마지막 장면은 재촬영을 했다는 말이 있다. 몸이 너무 아파 조연출에게 현장을 맡기고 떠났는데 결과물이 좋지 않아 김 감독이 재촬영을 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김 감독은 지병을 이겨내고 흥행 쾌거를 이뤄냈다. ‘군도’의 흥행은 어찌 보나. 어느 정도 최선의 결과라고 보나.
▦고=결과적으로 보면 개봉 시기를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명량’ 뒤에 개봉했으면 그 정도 흥행도 장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라=올 봄 여름 대작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군도’가 자신만만한 분위기였다. 개봉일도 먼저 확정하고 눈치 보듯 다른 대작들이 개봉일을 정하는 모양새였다.
▦고=배우와 아이템, 감독의 면면을 봤을 때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관심을 살 만한 프로젝트이긴 했다. ‘명량’처럼 대중적으로 찍었다면 훨씬 잘되지 않았을까. 백성이 봉기해 부패한 양반과 탐관오리를 때려잡는 내용으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감독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라=‘군도’의 최고 수혜자는 강동원과 윤종빈 감독이라고 생각난다. 흥행 대박은 나지 않았으나 강동원은 마성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줬다. 윤종빈 감독은 100억원대 영화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적 표현을 마음껏 했다. 투자사가 돈을 벌진 못했으나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니 다음 영화 메가폰을 잡기도 수월할 듯하다.
▦고=쿠엔틴 타란티노가 여름 블록버스터를 찍은 꼴이다.
▦라=맞다. 타란티노가 여름 블록버스터 ‘고질라’를 만든 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여름 시장에 그나마 적합한 영화는 ‘해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완성도랑은 무관하게 기획이란 측면과 상업성을 전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에서 가장 여름영화다웠다. ‘명량’은 여름영화라 하기엔 좀 무겁다.
▦고=‘명량’은 단순 명확하고 지향하는 바가 뚜렷한 영화다. 시대상황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가적으로 어둡고 답답한 느낌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해무’는 여름 시즌용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끔찍하고 뭔가를 해소해주는 카타르시스도 없는 영화다. 마케팅비를 포함해 총제작비 100억원 영화로서는 너무 큰 모험이다. ‘해적’은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고 흥행도 잘 되고 있지만 영화 전체적인 만듦새는 B급 스타일이다. 여름시장은 A급 영화가 나오는 시장이다. 돈을 들인 것 이상으로 보여야 좋은 영화인데 ‘해적’은 고래 컴퓨터그래픽에 많은 공을 들여서인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군도’는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을 다 쏟아 붓는 영화다. 투자배급사의 1년 농사를 대표적으로 책임져야 할 ‘텐트폴’ 영화인데 감독의 작가주의적 욕심을 채우는데 100억 이상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다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라=그래서 ‘군도’의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이 윤종빈 감독이라 한 것이다. 170억원이 들어간 ‘해적’은 70억원 정도로 기획해서 만들었어야 할 영화인 것 같다. 흥행이 되긴 하지만 이익을 더 많이 남길 수 있는 영화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고=‘명량’과 비교해보면 ‘해적’의 해전이 참 초라하다.
▦라=바다에서 찍은 장면이 하나도 없고 해변에서만 두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아무리 컴퓨터 그래픽 만능시대라 해도 바다가 주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해무’도 바다가 주요 배경인데 바다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고=제목이 ‘해무’인데 해무의 스산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냥 사람들이 미쳐가는 과정만 보인다. 그 과정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바다라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공포가 부족해 아쉬웠다.
▦라=흥행이 잘돼 망정이지 세월호 참사 직후 충무로에선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 망했다’는 한 숨이 감돌았다. 특히 울돌목이 등장하는 ‘명량’이 타격이 클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래서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개봉을 추석 시즌으로 옮긴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흥행은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다.
▦고=영화와 무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빨리 잊는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참사 당시 개봉했으면 부정적 여론이 많이 모아졌겠으나 요즘은 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잊거나 외면하려 하는 것 같아 놀라곤 한다.
▦라=영화관계자들이나 영화전문가들이 종종 사회적 이슈화와 영화 흥행의 관련도가 높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확실히 편견이라는 생각도 든다.
▦고=‘명량’은 작년에 나와도 아마 흥행이 잘 됐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처럼 시대를 초월해서 통하는 소재가 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드라마는 늘 잘 먹혔던 듯하다. MBC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도 그랬고 KBS ‘불멸의 이순신’도 그랬고.
▦라=1970년대에 이순신 장군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그때 미니어처로 해전 장면들을 재현했다. 일본 스태프들이 와서 구현을 했다.
▦고=1980년대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에서 해전을 다룰 때 미니어처도 일본기술이었다.
▦라=그 사이 한국영화가 산업적, 기술적으로 성장했음을 ‘명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도 본다. 김한민 감독이 한산대첩과 노량해전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해서 다른 제작사들이 땅을 친다는 소리가 들린다. ‘명량’의 후광에 기대 비슷한 이순신 사극을 만들려던 의도가 아예 봉쇄됐기 때문이다.
▦고=김한민 감독 자신도 후속작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최민식을 일단 설득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최민식이 ‘명량’ 캐스팅 단계에서 출연을 번복한 적도 있다고 하더라. 김 감독과 투자배급사가 계속 설득한 끝에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최민식은 외적으로보다는 내적으로 상당히 힘들어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최다 관객을 동원했으니 이제는 후편 출연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워낙 고집이 센 분이라서 안 할 수도 있겠지만.
▦라=영화계에선 후편을 만들면 최민식을 대신해 누가 이순신 역할을 다시 할까라는 말들이 조금씩 나온다. 이순신 장군 역은 이제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처럼 성스러운 독배가 됐다. 더군다나 일급배우 최민식의 자리를 메워야 하니 누구라도 부담이 클 것이다. 잠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순신은 이순신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출연했던 김명민을 데려다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최민식이란 배우의 힘이 아주 큰 듯하다. ‘명량’의 이순신 역이 최민식의 베스트 연기라 할 수 없지만 그처럼 존재감만으로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중량감을 전해주는 배우가 흔치 않다.
▦라=다른 영화 속과 달리 최민식의 연기는 폭발한다는 느낌이 없다. 하지만 그가 연기할 때 현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압도됐다고 한다. 이번에는 스크린에서 안 느껴졌지만 참 뜨겁고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가 맞긴 맞는 것 같다.
▦고=관객들도 최민식의 카리스마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사람 자체만으로도 어필하는 점이 꽤 많은 것 같다. 믿음을 준다. 노력하고 성실한 배우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 ‘해무’의 김윤석은 반복의 느낌이 강하다. 대중은 편견을 금방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한 배우가 비슷한 배역을 계속하면 위험해지지 않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속 연기랑 비슷하다는 말들이 많다. 관객이 몰입하는데 있어 캐릭터의 매력도 중요한 것 같다.
▦라=‘해무’는 충무로의 아이돌 배우 사용법을 보여준다. 보통 아이돌은 팬들에게 판타지를 주는데 국내 아이돌 배우의 영화 속 역할은 판타지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동창생’의 최승현도 북에서 온 살인병기였고 ‘해무’의 박유천은 곤경에 처하는 순박한 막내 선원 역할이다. 아이돌 이미지를 벗기 위해 그런 험한 역할을 선호할 수 있는데 사실 흥행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고=한국 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배우가 티켓 파워를 가지기는 어렵다.
▦라=그래도 ‘해무’의 최고 수혜자는 박유천이다. 자신이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아닌 배우라는 이미지를 진중한 역할에 기대 확실하게 보여줬다. ‘해무’는 영화배우 박유천의 인상을 강하게 남길 영화다.
▦고=동감이다. JYJ의 세 멤버 중 연기 욕심도 가장 많고 그의 입장에서도 연예계 활동을 오래 하려면 아무래도 연기 쪽에 기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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