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호가 적힌 명함을 들고 경찰서를 누빈 지 벌써 16주차가 됐다. 경찰기자의 길에 첫 걸음을 내딛던 날 경찰서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 같았다. 여전히 경찰서는 우리 견습 72기에게 막막했던 장소다. 그러나 우리는 버텨내는 중이다. 살아남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배정된 경찰서 앞마당에서 처음으로 일진을 만났던 5월 11일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사스마리’ 진행형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경찰관, 소방관은 물론이고 가해자, 용의자, 피의자, 피고, 피해자와 같이 법률용어로 수식된 사람들과 피해자의 가족, 피의자의 지인, 용의자의 선생님처럼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진 사람들까지. 사건, 사고와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들까지도 우리는 ‘취재원’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을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잘 모르던 햇병아리들이 이제는 농담도 조금씩 섞어가며 넉살을 부린다. 지금껏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보다 경찰서 견습기간 동안 만난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장소를 다녀왔다. 진도, 안산처럼 물리적인 장소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겪었던 사건, 사고들이 일어난 장소를 꼭 가본 것만 같았다. 10년 전 발생했던 군 의문사에 대해 유가족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뭇가지 하나하나까지 목소리로 설명해줄 때는 머릿속에 그 장소가, 사건의 분위기가 그려졌다. 새벽녘 형사당직실 데스크 앞에서 사건을 취재할 때 들었던 몇월 며칠 ‘XX동 XX길 XX주점 앞’이라는 팩트까지 장소로 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곳을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6주차를 맞이하는 지금까지 결국 견습기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모르는 게 많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리하는 것도 벅찰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사람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고 또 다시 듣고 묻는 과정이 결국 ‘취재’였다. 그들이 겪은 경험, 그들이 갔던 장소, 그들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기자에게 새로운 경험이면서 기사의 원천이었다.
우리 견습 72기 동기들 역시 서로에게 사람이었다. 처음 2진 기자실에 들어갔을 때, 취재를 하다가 막혔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끝없는 외로움을 느끼거나 우울함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새벽 두시 보고를 아무런 성과 없이 마치고 축 처진 어깨로 기자실에 돌아왔을 때 불 꺼진 기자실 한 쪽에서 나지막이 동기가 던진 “고생했어”라는 한 마디. 이는 백 마디 다른 말보다 힘이 됐다. ‘내게 기자라는 직업은 맞지 않을지도 몰라’ 고민하던 때에도 동기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힘내라는 카톡 한 마디를 찍어주곤 했다.
아직 견습기자라는 딱지를 떼기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나를 포함한 열두 명이 겪은 경험은 모두 달랐다. 동기들 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 사고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공통적으로 배웠을지 모른다. 사람을 떠나서 기사는 나올 수 없다는 것, 사람이 먼저라는 것. 100일을 갓 넘긴 햇병아리 견습기자들이 필드에서 부딪히며 느낀 가르침은 우리가 견습을 떼고 기자생활을 이어가는 한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한국일보 견습 72기, 우리 모두의 건투를 빈다. ['견습 수첩' 시리즈 모아보기]
견습 72기 김진욱 기자 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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