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 사라졌던 '패장(敗將)'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5년 만에 '반격'에 나섰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을 담은 대담집을 내면서 대우사태의 책임을 김대중정부의 핵심관료들에게 물었다. 이를 두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대우가 시장에서 신뢰를 잃어서 퇴출당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스스로 논란의 장에 들어선 김 전 회장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까. 한때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대기업 2위에 빛나던 대우와 김 전 회장의 영욕을 되짚어본다.
● 김우중은 누구인가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교육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과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신문배달과 열무·냉차 장사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학창시절에는 차비를 아낀 돈으로 책을 사 공부했다.
1967년, 김 전 회장은 자본금 500만원과 직원 5명을 모아 충무로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대우실업’을 차렸다. 대우실업은 셔츠와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에 수출했는데, 설립 1년 만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1972년, 대우실업은 창립 5년 만에 국내 2위의 수출기업이 됐다. 김 전 회장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렸다. 한국기계공업, 옥포조선, 새한자동차 등을 잇달아 인수했고, 1982년에는 (주)대우로 상호를 변경했다.
● 한 발 앞선 ‘세계경영’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우는 '세계경영'을 내걸고 해외시장에 역량을 집중했다.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동차 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세계경영에 대한 김 전 회장의 집념은 대단했다. 연간 해외 체류기간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사업에 매달렸다.
김 전 회장은 '수출→성장→고용'으로 이어지는 ‘한국식개발경제모델’을 가장 잘 이행한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용정책도 파격적으로 폈다. 1990년대 초, 대부분의 기업들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부정적이어서 운동권 출신을 기피했다. 하지만 대우는 이들을 과감하게 채용해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는 이들을 ‘세계경영’을 실천할 수 있는 주력집단으로 키우기 위해 직접 면접을 봐가며 채용했고, 훗날 이‘대우맨’중에서는 김 전 회장의 호위무사를 자청한 이들도 있다.
당시 대우그룹의 성장은 수치를 살펴보면 두드러진다. 해외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5년 만에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1999년 그룹 해체 직전에는 83조원의 자산에 62조원의 매출을 일으키며 41개의 국내 계열사와 396개의 국외법인을 거느린 재계서열 2위 기업이었다. (▶기사보기)
● 과욕이 부른 몰락
대우는 세계로 뻗어갈수록 곪아갔다. 해외사업은 사업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필요하지만, 단기간에 이익을 보긴 어려웠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대우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현금확보를 위해 무리하게 채권을 발행하다 보니 부채비율이 급격히 늘어났다. IMF 이후 높아진 금리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외형은 화려했지만, 사실은 빚을 얻어서 빚을 갚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결국 부채가 60조원에 이른 1999년 8월, 대우그룹은 워크아웃에 돌입하며 해체됐다.
1999년 10월18일, 김 전 회장은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는 한창 대우사태 책임론이 거셌을 때다. 2005년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253억원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 기사보기)추징금은 지금까지 840억원을 갚았다. (▶ 기사보기)
김 전 회장이 대우사태에 대한 책임을 면하긴 어려웠다. 외환위기 때 대부분의 기업이 긴축 경영에 나선 것과 달리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고 고금리 자금을 끌어들이는 등 외형 확대에 치중했다. 결국 대우의 부채 60조여원은 금융권 부실로 이어지며 금융권 구조조정으로 이어졌고, 협력업체의 연쇄도산을 불렀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30조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 칼럼읽기)
● 재평가 논란 불붙나
김 전 회장의 재평가에 관한 찬반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 칼럼읽기)세계를 호령하던 대우그룹의 영광은 분명 ‘신화’였지만, 대우사태는 단군 이래 최대 경제사고라고 할 정도로 국가경제에 미친 파장이 컸다. (▶ 칼럼읽기)
지난 26일, 김 전 회장이 저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출간을 맞아 열린 세계대우경영연구회 특별 포럼에 모습을 비췄다. 그는“세간의 평가는 억울하다”면서 끝내 울먹였다. (▶ 기사보기) 대우가 그 동안 알려진 것처럼 세계경영을 모토로 지나친 확장 투자를 벌이다 대우자동차의 부실로 몰락한 것이 아니라 DJ정부의 경제관료에 밉보이는 바람에 기획 해체됐다는 얘기다. 대우사태 이후 김 전 회장과 ‘대우맨’들은 이 같은 주장을 계속해왔다. (▶ 기사보기)
김 전 회장은 ‘김우중법’으로 불리는 추징법안에 대해 “대우 몰락, 징역형 선고에 이어 23조원 추징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기업가를 세 번 죽인 부관참시”라고 주장했다. 추징금 납부 계획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명예 회복과 함께 그를 옥죄고 있는 추징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접 나섰다는 지적도 나온다. 잘못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없이 과거의 영광만 높이 평가 해달라는 ‘궤변’만 늘어놓는다는 비판이다. (▶ 기사보기)
김지현기자 hyun16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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