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한 달 간 자유를 마음껏 즐기세요”
다음달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건네는 김모(34) 과장에게 한 덕담.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이미 같이 살고 있는데요?”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이들은 올 봄에 결혼을 약속하며 신랑인 김과장이 전세로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정했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는 내년 상반기에 좀 더 번듯한 집을 마련해보자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고향이 대구인 신부 역시 혼자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 마침 전세 계약이 12월에 끝나는 터라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심산으로 집주인에게 “10월에 집을 빼도 되겠냐”고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집주인은 “혹시 더 일찍 집을 비워줄 수 있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공인중개소에 얘기를 했더니 당장 들어오겠다는 세입자가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이지요.
신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집을 빼주면 전세보증금을 결혼 준비에 보탤 수 있지만 당장 살 곳이 없어지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조금 이른 신혼생활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양가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같은 회사의 최모(31) 대리 역시 11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법적으로는 이미 유부남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것은 올 3월. 대출을 받아 전세로 살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먼저 은행을 찾았습니다. 신혼부부에게 주어지는 대출 혜택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부 합산소득이나 무주택 등 대부분의 조건들이 부합했지만,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비 부부의 경우 예식장 계약서나 청첩장 등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되는데, 문제는 결혼식 두 달 전부터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1월이 결혼식이니 9월 이후에나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하다 보니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것이지요. 혼인신고를 하면 법적으로 부부가 되기 때문에 당장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두 사람은 7월에 혼인신고를 하고 대출을 받아 현재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마련해둔 상태입니다.
결혼을 앞둔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누가 뭐래도 집입니다. 두 사람이 모은 자금만으로는 내 집 마련은커녕 전세 구하기도 버거운 게 현실입니다. 더구나 전셋값마저 해마다 수천만 원씩 뛰고 있으니 집을 구할 엄두가 안나 결혼을 마냥 늦추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하지요.
이 같은 현실은 결혼 풍속도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금기에 가까웠던 혼전 동거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최대한 늦추는 경향이 강했던 혼인 신고를 아예 결혼 전에 해버리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가 늘면서 ‘얼리(Early) 부부’라는 신조어도 생겼다고 합니다.
집을 구하기 어렵고 주거비가 치솟는 현실로 인해 과거의 관행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실용적인 문화가 강해지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신혼여행지에서 느끼는 ‘첫날 밤’의 설렘이나 결혼 전에 만끽할 자유의 시간이 줄어들 지는 몰라도 새로운 출발선에 선 두 사람만의 안락한 터전을 마련하는 것,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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