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국정원법 위반 혐의엔 "심리전단 활동 직무 범위 넘어"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목적성·능동성·계획성 결여"
1심 판결까지 15개월이 걸린 ‘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정치개입은 지시했으나, 선거운동은 지시하지 않았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형태로 끝맺었다. 재판부의 결론은 현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면죄부로 읽힌다.
불법 정치개입은 분명
법원은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엄격하게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그의 지시로 시작된 국정원의 사이버 및 트위터 상의 활동을 국정원법이 금지한 ‘불법 정치개입’이라 못 박았다. 재판부는 “정권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야당과 야권 정치인들을 비방하는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원 전 원장은 더 나아가 4대강 사업 등 특정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 정당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등 사실상 구체적인 반대·비방 활동을 지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원 전 원장이 이후 구체적인 진행 내용을 보고 받고 심리전단에 별도의 지시까지 내렸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원 전 원장의 주장도 일축했다.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실행에 옮긴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도 국정원법 위반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정원법이 국정원의 국내 업무를 대공·대정부전복·방첩·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에 대한 보안 업무로 명확히 국한하고 있다”며 “아무리 북한의 대남심리전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일반인으로 가장해 인터넷 공간에서 글이나 트윗을 게시해 국정을 홍보하고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법이 허용한 (국정원의) 직무라 볼 수 없다”고 명시했다. 특히 재판부는 “북한의 대남심리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면, 그 사실을 유관기관에 배포해 차단하거나 국정원의 수사권을 행사해 방지할 수 있었다”며 국정원의 허술한 논리를 지적했다.
선거운동 지시 자의적 판단
하지만 불법 정치개입을 명확히 인정한 것과 달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판단에선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우선 선거법이 규정하는 ‘선거운동’을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구분해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당선이나 낙선을 위한 행위’를 인정할 수 있는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고 선거운동을 좁게 해석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부당하게 정치에 개입은 했으나 명시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시’하지는 않아 무죄라고 해석했다. 부당한 정치 개입으로 다소 선거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특정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을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죄가 없다는 취지다. 오히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부서장 회의 녹취록 중 “대선정국을 맞아 (국정)원이 휩쓸리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라”는 부분에 집중, 공명한 선거를 위해 노력했다고 확대 해석했다. 원 전 원장이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중략)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 등의 발언을 한 것은 무시했다.
수차례 대선과 총선이 언급되지만 “모 후보를 당선시켜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없는 이상 선거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국정원법에도 ‘지지ㆍ반대 여론을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는데, 국정원법 위반의 목적성은 인정하고도 선거법 위반의 목적성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게시글에 대한 판단 누락
재판부는 11만여건에 이르는 온라인 게시글의 내용은 정면으로 따져보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이 제18대 대통령선거 시기 즈음에도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글을 작성 및 게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는 야당 또는 야권 정치인들을 반대ㆍ비방하는 글을 작성 및 게시했다”며 “당시 제18대 대선의 후보자 또는 후보예정자 등과 그들의 소속 정당에 대한 반대ㆍ비방 취지의 글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 인정되는 바,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제18대 대통령 선거시기에 선거운동을 하였고, 이와 같은 선거운동을 피고인들이 지시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이정도 심증으로 피고인들이 그러한 목적으로 위 직원들에게 선거운동의 지시를 하여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박근혜 후보에 대한 찬양, 문재인ㆍ안철수 후보에 대한 비방의 글들 내용에 대해 일부라도 선거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재판부는 판단을 누락했다.
꾸짖는 모양새로 양형은 가볍게
집행유예로 양형은 가벼웠다. 앞서 인정한 국정원법 위반의 취지와 달리 국정원 임무의 특수성을 감안한 결과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위법성을 인식하고 특정 정당에 공작을 벌일 목적으로 범행을 지시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책임을 덜어준 데 이어 “과거 국정원의 잘못된 업무수행 방식의 관행을 탈피하지 못해 비롯된 것”이라며 과거의 악습으로 책임소재를 떠넘기기도 했다.
현행 국정원법은 위반자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대 징역을 5년으로 한정하는 선거법보다 처벌이 높은 법률이다. 앞서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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