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선거법 판례와 배치, 국정원에게만 관대한 잣대"
"朴정부 정통성에 불똥 고려 의심, 사법부에 대한 불신 깊어질 것"
“앞으로도 정부기관의 교묘한 선거개입이 용인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참여연대 박근용 협동사무처장)
“사법부가 여전히 정치적 독립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 전형적인 눈치보기, 절충형 판결이다.”(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1심 재판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핵심인물 3명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시민사회와 학계, 법조계를 막론하고 비판이 쏟아졌다. 재판부가 불법 정치개입을 인정하면서도 선거운동이 아니라는 법리적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했지만, 결국 실체적 판단을 피한 형식논리로 ‘민주주의가 아닌 권력에 봉사하는 정보기관’을 용납했다는 지적이다.
이번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목소리의 대부분은 “선거운동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정원 심리전단이 (특정 후보를 지지ㆍ비방하는) 댓글을 단 행위를 선거운동이라고 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국민들이 납득하겠나”며 “법원 판결에 동의하는 국민들은 진보진영은 물론, 중도진영에서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가기관의 선거운동은 오히려 엄격히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선거 시점에 권력기관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심되는 행위를 한다면 선거운동으로 볼 수 있다”며 “원 전 원장 등의 지시에 의도나 목적이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한지는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추상적 위험만 야기했더라도 처벌하는 게 그 동안의 선거법 판례였는데, 국정원에게만 관대한 잣대를 들이댔다”며 “국정원의 댓글 활동이 대선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판단하는 게 우선이었으나 이를 외면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성공한 쿠데타는 죄가 아니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법원이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점도 비판 대상이다. 선거 국면에서 도대체 왜, 국정원 직원들이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는 불리한 내용의 글을 올리거나 퍼뜨리는 ‘위험한’ 행위를 했는지를 참작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소한 국정원 이종명 전 3차장이나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암묵적인 지시는 있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정태호 경희대 교수는 “이런 부분(댓글의 내용과 지시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을 유예한 것은 직무유기”라고 “상명하복이라는 국정원 구조상 당연한 사실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비겁한’ 판결”이라고 쏘아붙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정치적으로 타협한 판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선거법 위반까지 유죄 판단을 할 경우, 박근혜정부의 정통성이 도마에 오를 게 뻔하기 때문이다. 김종서 배재대 공무원법학과 교수는 “선거법 위반을 인정하면 대선 자체의 효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를 피하기 위한 판결”이라며 “박 대통령이 ‘사법부 판단을 지켜보자’고 언급했을 때 재판부로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도 “원 전 원장 등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다고 인정해 버리면 이명박 전 대통령, 박 대통령한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악행이었던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을 엄단하고 근절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고위 법관 출신인 한 변호사는 “선거는 나라의 근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이고, 정보당국이 이에 개입했던 불행했던 역사를 이번에야말로 끊어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국면에서 특정 후보 지지 또는 비난 글을 온라인에 게재, 사실상 선거에 영향을 미친 행위를 한 데 대해 결국 누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됐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김청환기자 chk@hk.co.kr
장재진기자 blan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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