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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위 시간은 멈췄지만...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입력
2014.09.1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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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연작 'Today' 시작

캔버스에 수차례 물감 덧칠하고 장식 없이 그날 날짜만 그려

기인의 삶

말과 글로 작업 설명한 적 없고 인터뷰ㆍ사진 촬영도 거절

온 카와라는 미학적 표현을 극단적으로 배제한 '날짜'그림 연작으로 자신만의 개념 미학을 완성했다. 그는 똑같은 작업을 근 50년 동안 붙들고 늘어졌고, 그럼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저 과묵한 3,000여 점의 작품으로 그는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예술적 자의식을 드러냈다.
온 카와라는 미학적 표현을 극단적으로 배제한 '날짜'그림 연작으로 자신만의 개념 미학을 완성했다. 그는 똑같은 작업을 근 50년 동안 붙들고 늘어졌고, 그럼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저 과묵한 3,000여 점의 작품으로 그는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예술적 자의식을 드러냈다.
온 카와라의 마지막 작품. 'JULY 10, 2014'. 그는 저 작품을 끝낸 뒤 7월 말 숨을 거뒀다. 그는 29,771일을 살았다.
온 카와라의 마지막 작품. 'JULY 10, 2014'. 그는 저 작품을 끝낸 뒤 7월 말 숨을 거뒀다. 그는 29,771일을 살았다.

물감을 섞어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바탕색을 만든 뒤 캔버스에 물감을 입힌다. 캔버스가 마르면 다시 바르고 또 바르고…, 그렇게 네 번, 어떤 날은 다섯 번. 그 캔버스 위에 그는 하얀 물감으로 그날의 날짜를 그렸다. 삐침도 장식도 없는, 단정한 산세리프 폰트.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일본의 개념미술가 온 카와라(On Kawara)의 ‘날짜 그림’ 연작이다. ‘JAN.4,1966’으로 시작해서 ‘JULY 10, 2014’의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근 50년 동안 그는, 하루에 같은 날짜 그림을 두 장 그린 날도 있었고 한 장도 안 그린 날도 있었고, 63점만 그린 해도 있었고 241점을 그린 해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강박적인 작업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약 3,000점의 과묵한 날짜 그림을 남긴 온 카와라가 7월 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작가는 지인들에게 고무도장으로 자신이 일어난 시간을 찍은 엽서를 보내곤 했다. 저 엽서의 의미는 받는 이들 각자에게 한없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지인들에게 고무도장으로 자신이 일어난 시간을 찍은 엽서를 보내곤 했다. 저 엽서의 의미는 받는 이들 각자에게 한없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작가들은 대개 작품을 완성한 뒤 서명과 함께 작업한 날짜를 적곤 한다. 카와라에겐 그 날짜가 그의 작품이었다. 사실 날짜는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든 활동과 살아있음으로써 남기게 되는 수많은 흔적들을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일 때 그 형식을 완성하는 마침표 같은 진술이다. 군더더기 없이 날짜로만 완성되는 그의 작품에서 모티프와 주제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오브제가 작품이었고, 작품이 곧장 오브제였고, 개념 자체 삶 자체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작업을 스스로 정한 하루 24시간의 엄격한 규율 안에서 행했다. 예컨대 20일 00시부터의 24시간은 전적으로 작품 ‘20일’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이어서 19일이나 21일을 증거하는 데 쓸 수 없었다. 그는 자정 전까지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곧장 폐기했는데, 그 규율은 시간이 정한 규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의 굴레 안에서 그는 구도자의 일상처럼 반복적으로, 말 그대로 강박적으로, 극도의 침묵 같은 날짜 그림들을 그렸고,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거기서 이야기를 찾게 했다.

숫자가 다르고 바탕색이 다르고 캔버스의 크기와 붓질의 흔적이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래서 어제의 그림과 오늘의 그림은 틀림없이 다른 작품이지만, 그게 꼭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건 또 하루가 지나갔다는 의미, 그날 그가 그 시간의 굴레 안에서 작업을 했다는 의미, 요컨대 그가 살아있었다는 진술의 의미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지닌 희미한 개별성을 통해 전체로서의 육중한 독자성을 이룩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그가 완성한 작품은 ‘시간’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한계와 기억과 흔적과 상상력… 등등, 뭉뚱그려 인간이 시간에 순응하고 또 저항하는, 다시 말해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거대한 수수께끼다.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행위는, 그러므로 시간과 고요히 대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아니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을 말이나 글로 설명한 적이 없다. 해설과 비평은 분분했으나 그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행위 자체를, 적어도 겉으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날짜 그림 작업을 시작한 직후인 1965년 6월 일본의 한 미술평론가와 인터뷰한 것을 끝으로, 그는 어떤 인터뷰에도 사진 촬영에도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작품 전시회 개막식에도 아주 드물게만 얼굴을 내비쳤다. 그는 오직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작업이 수용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작품 뒤에 숨어서 작가로서의 공적인 페르소나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는 삶 자체도 수수께끼로 남겼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연작의 ‘일지(Journals)’를 남겼다. 1년 단위의 작업 기록인 셈인데, 그는 작업한 날짜마다 캔버스의 바탕색으로 쓴 색상지를 손톱 크기로 오려 붙이고, 캔버스의 크기와 일련번호, 작업한 장소, 그날의 주요한 일상이나 뉴스 등을 기록했다. 1968년에는 일지의 확장판이랄 수 있는 ‘100년- 20세기 “24,845일”’이라는 제목의 100년 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20세기 100년의 하루하루를 한 장으로 옮긴 이 달력 안에 그는 자신이 산 날을 노란색으로 표시했고, 날짜그림을 그린 날에는 녹색 점을, 두 장 이상 그린 날엔 빨간 점을 찍었다. 20세기 백년달력은 2004년 완성됐고, 현재 21세기 100년 달력의 색인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는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도시를 떠돌며 그림을 그렸는데, 가디언지는 최소 112개 도시라고 했고, 뉴욕타임즈는 130곳이 넘는다고 썼다. 그는 해당 도시의 날짜 표기법에 맞춰 그림을 그렸고, 로마자 알파벳을 쓰지 않는 도시에서는 에스페란토어 표기법을 따랐다. 그렇게 떠돌며 그는 1968년의 어느 날부터 지인들에게 간간히 전보를 치기 시작했다. 전문은 대개 단 한 마디 “I am still alive- On Kawara(나는 아직 살아 있다- 온 카와라)”였다. 주로 자신이 아는 큐레이터나 작가 딜러 등이 대상이었는데, 전보의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자살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 “자살하진 않을 테니 걱정해””이제 잘거야, 다 잊어”(가디언, 2002.12.3)

그가 머무는 도시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I Got Up’시리즈로 알려진 엽서에 그는 그날 일어난 시간과 머문 도시의 주소를 고무도장으로 찍었다. 미술비평가인 애드리안 설은 2002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카와라가 79년 어느 날 고무도장을 도둑맞은 뒤 엽서 보내기를 중단했다고 썼다.‘I Met’시리즈의 엽서도 있다. 그날그날 그가 만난 이들의 이름을 타이핑한 엽서였다.

온 카와라는 1932년 12월 24일 일본의 아이치(愛知)현 카리야시에서 태어났다. 1933년 1월생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그의 생존일을 역산하면 32년의 저 날짜가 나온다고 한다. 그는 전시 작가 약력에 자신의 출생일 대신 생존일수(life date)를 밝히곤 했다. 51년 카리아고교를 졸업한 그는 도쿄로 이사해 그림을 그리면서 독학으로 서양철학과 정치학, 정신분석 이론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0년대 그의 그림들은 주로 구상회화였는데, 절단된 신체들이 욕조에 떠있는 장면을 묘사한 목욕탕 시리즈 등이 있었다. 그는 한 엔지니어링 회사의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59년 멕시코시티로 이주, 미술학교를 다니며 3년을 보낸 뒤 62년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다. 뉴욕에서 8개월 동안 머물며 팝아트 등을 경험한 뒤 유럽으로 떠나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등을 여행한다. 그가 ‘오늘(Today)’연작으로 알려진 날짜 그림 작업을 시작한 것은 64년 뉴욕에 정착한 직후부터였다.

초기 얼마 동안 그는 주문 제작한 작품 상자 안에 그 날짜의 지역 신문이나 특정 기사의 스크랩을 첨부하기도 했다. 가령 첫 작품인 ‘1966년 1월 4일’에는 뉴욕의 교통파업 기사가 딸려 있다. 하지만 얼마 뒤 그는 뭔가를 넣는 걸 그만 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개별적인 사건의 역사성 속에 갇히는 것이 싫었을지 모른다. 개념미술이라는 개념이 표현되기 전부터 개념미술가였던 그는 작품 속에 감정이 묻는 걸 극도로 피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가장 건조한 작품 형식에도 바탕색이나 캔버스 크기 등을 통해 그 ‘오늘’의 의미를 달리했다. 그의 오늘 연작은 8X10인치서부터 61X89인치까지 모두 8개 크기의 캔버스로 이뤄졌다. 1969년 7월 20일 기점으로 가장 큰 캔버스에 어두운 잿빛을 바탕색으로 세 점의 ‘오늘’이 그려진 것이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니면 사적으로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지, 이도 저도 아니라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른 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1969년 ‘100만년- 과거(One Million Years- Past)’ 작업에서도 재연됐다. 그는 69년을 기점으로 B.C 99만8,031년까지 100만년의 숫자들을 타이핑해 책을 발간했다. 그 작업은 81년 ‘100만년- 미래’라는 제목으로 이어졌다. 거기에는 1996년부터 100만1,995년까지의 연도가 기록됐다. 5권씩, 각각 1만 페이지에 달하는 책에는 각각 부제가 달렸는데, 과거판에는 ‘지금 살고 있고 또 살다간 모두를 위하여’, 미래판에는 ‘마지막 한 명을 위하여’다. 가디언지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우리의 시간이, 개인으로서나 종(種)으로서, 우주적 관점 안에서 본다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 전람회 ‘도큐멘타 2002’에서, 또 2004년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서, 남녀 자원자에게 7일 밤낮 동안 그 책을 읽게 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1997년 그는 ‘순수한 의식(Pure Consciousness)’이라는 이름의 순회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잔과 터키의 이스탄불, 한국의 통영 등 세계 21개 도시를 선정, 한 유치원 교실에 자신의 작품 7점(1997.1.1~1.7)을 내거는 행사였다. 2008년 온 카와라의 전시를 주최한 두아트 서울 갤러리측은 당시 자료에서, 갤러리의 관객과 달리 온카와라의 날짜 그림에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고 노는 아이들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실었다. “온 카와라는 자신의 일상이 갤러리라는 포장을 벗어나고 싶어서 유치원이라는 일상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작업이 날것이니 보이는 공간도 날것이고 싶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온 카와라의 데이터가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보여진다고 해도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전시’라는 일정한 포맷으로 가공이 되는 겁니다.”물론 그는 일언반구 그 전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이나 공적인 삶에서 엿보이는 인상과 달리, 지인들과 어울릴 때면 유쾌하고 다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영국 이콘갤러리의 감독이자 유명한 큐레이터인 조나단 왓킨스는 가디언 기고문에서 2006년 카와라의 프랑스 파리 아파트를 방문한 일을 소개했다. 당시 TV에서 독일 월드컵의 한 경기를 중계 중이었는데, 경기가 격렬했던지 선수들의 할리우드 액션 장면이 잦았고, 그게 재미있었던지 카와라가 내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누가 이길지가 아니라 의료진이 실제로 그라운드에 불려갈 횟수를 맞추는 내기였다고 한다.

그의 숨진 날짜와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1999년부터 온 카와라의 미술활동을 대리했던 미국 뉴욕의 데이비드 즈뷔르느 갤러리 홈페이지에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의 이름 뒤에 생몰연도 대신 ‘29,771days’라는 생존일이 기록돼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해 누구는 존재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읽고, 또 누구는 집요한 존재 증명의 의지를 읽는다. 그가 생의 한때 사르트르와 카뮈의 문학에 심취했다는 점을 들어 실존주의 철학의 어떤 개념들로 그의 작품을 탐구하는 이들도 있고, 20세기의 웨일즈 시인 딜런 토마스의 유명한 한 구절 ‘그 멋진 밤 속으로 고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를 앞세운 긴 글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항거하는 의미로 그의 하루 연작이 이어졌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Japan Times, 2000.4.30)

‘엔트로피’라는 잡지의 편집자인 라이프 하벤은 전보와 엽서를 포함한 그의 모든 작업들이 실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소통의 욕망, 곧 존재론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다고 이해한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 하나의 진실이 뭘까, 나 지금 살아있다, 나 일어났다, 같은 말 아닐까?” 하벤은 온 카와라가 소통을 끝낸 날, 다시 말해 그의 마지막 날짜 그림이 만들어진 2014년 7월 10일이 그가 숨진 날이라고 ‘엔트로피’에 썼다. 하지만 그는 온 카와라가 시작한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그의 트위터 봇을(@ on kawara) 예로 들었다. 그 계정에는 매일, 그가 숨진 뒤에도 하루 두세 차례씩 ‘I am still alive’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는 그 계정이 카와라의 작업을 완벽하게 현실화하고 있다고, 지금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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