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작곡한 악보를 건네 받았습니다. ‘조선민요 피아노 명곡선’에 실린 이 악보들은 작곡자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 당신의 이름조차 알 길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작품을 연주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주회를 제안 받았을 때 묘하리만치 양가감정이 충돌하더군요. 설레었지만, 두려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엔 해마다 반공 글짓기와 포스터로 철두철미 반공의 투지를 단련했었죠. 빨간 뿔이 난 도깨비에 용감히 맞선 이승복 오빠를 즐겨 그렸으니까요. 그런데 요새 아이들은 저 같은 구닥다리 반공세대와는 썩 다른 모양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선가 대상을 차지한 반공포스터가 화제였는데, 꼬마의 표어는 이랬습니다.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당신 악보의 첫인상은 투박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읽어온 음표들을 다이어트 시킨 듯, 날렵한 머리와 몸매가 인상적이었어요. 연주자들에게 ‘이음줄’과 ‘나타냄말’은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할만한 가장 기초적인 장치일텐데, 당신의 악보에선 퍽 인색하게 등장하더군요. 음악적 문맥의 파악을 연주자에게 믿고 맡긴 당신은 굉장히 너그러운 작곡가인가도 싶었습니다. 그러니 딱 두 군데, 한글로 또박또박 새겨있는 당신의 나타냄말에는 유달리 마음이 갈수 밖에요. ‘빠르고 생기있게’와 ‘률동적으로 정서있게’. 제 주변의 동료 작곡가였다면 십중팔구, 이런 한글표현 대신 ‘Allegro vivace’나 ‘espressivo’등의 이탈리아어로 악보에 기입했을 테지요. 두음법칙을 마다하며 율동을 ‘률’동으로 표기한 것도 신기했어요.
제가 연주할 당신의 작품은 ‘새야새야’와 ‘돈돌라리’ 두 곡입니다. 성악가를 반주해본 적은 있어도, 우리의 민요를 오롯이 피아노 독주로만 연주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습을 하다 보면 여러 상념에 휩싸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놓여있을 두음법칙이나 반공포스터 따위의 문화적, 정치적 장벽에 서먹하다가도, 두 사람의 혈류를 공통으로 관통하고 있을 흥겨운 신명에는 본능적으로 박동하니까요. 게다가 ‘새야새야’는 전라도의 들녘에서, ‘돈돌라리’는 함경도의 북청에서 불리던 민요였으니, 남과 북을 연주로나마 활공하는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래가 많다는 북청의 산천을 저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새야새야를 작곡하던 당신 역시 녹두장군을 노래한 남도의 너른 들판을 그저 상상으로만 그렸겠지요.
‘돈돌라리 돈돌라리 돈돌라리요, 리라 리라리 돈돌라리요’ 저에겐 마냥 낯선 이 북청민요의 가사를 천천히 발음해 보았습니다. 입속에서 부드럽게 돌고 돌아 모서리 없이 둥글게 감기는 울림에 금새 정감이 깃들더군요. 남대천의 모래강변이나 속후의 모래산에서 여인들이 달래를 캐며 불렀다는 돈돌라리는 그 발음과도 같이 전형적인 윤무(輪舞)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선율은 굿거리 장단으로 돌고 도는 리듬과 기막히게 어우러집니다. 메김소리와 받는소리가 음역과 음색을 달리하며 서로의 흥취를 돋우는 악절도 퍽 인상적이었어요.
당신에게 너그러운 양해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악보의 몇몇 부분에 제 재량껏 음표를 덧대었거든요. 투명하게 펼쳐지는 화음음형과 간결히 떨어지는 리듬을 당신이 얼마나 편애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니 민낯처럼 순수한 당신의 음악에 조금은 삐딱한 치장을 하고 싶어졌어요. 정직한 도약으로 해결되는 베이스는 반음계 진행으로 흩뜨려 놓았고, 순도 높은 리듬은 부점과 당김음으로 약간의 불순물을 가미했습니다. 하지만 몇 군데는 도무지 이해되질 않아 큼지막한 물음표를 그려 넣었습니다. 악보를 인쇄할 때 생겼을 오타겠거니 속 편히 여기기로 했지만 실상은 애가 탑니다. 제 동료 작곡가와 작업하듯, 당신에게도 한 달음에 달려가 직접 묻고 음악적 해결을 상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이름조차 모르는 당신의 작품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반공포스터와 두음법칙에 가로막혀 있는 당신, 남도의 들녘을 애틋이 상상했으니 북청의 모래를 공상할 누군가도 단박에 이해해줄 당신.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될 그 날을 진심으로 고대하며 연주하겠습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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