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前 삼일교회 담임 목사 사퇴 뒤에도 버젓이 목회활동
피해자 8명 증언 담은 책 출간 “목회자 신격화가 진실 가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
한 권의 책이 잊혀져 가던 추악한 성추행 사건을 망각 속에서 끄집어냈다. 최근 출판된 ‘숨바꼭질’(대장간)이다. 전병욱 삼일교회 전 담임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다뤘다. 새로 드러난 성범죄 사실이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담겼다.
이런 책이 나온 건 전례를 찾기 어렵다. 사실 목사의 성범죄뿐이라면 책 출간까지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목사의 범죄에 대처하는 교회 집단의 무신경 온정주의, 목사가 곧 신이 되어 버린 개신교계의 그릇된 맹신이 삼일교회 전ㆍ현 교인들에게 펜을 들게 했다.
가해자인 전 목사는 삼일교회만 떠났을 뿐,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버젓이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성범죄 사실을 명확히 인정하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은 채 사임한 전 목사에게 교회는 13억4,500만원이라는 거액의 전별금까지 쥐어줬다. 삼일교회의 전ㆍ현 교인인 집필자 지유석(42)씨와 권대원(43)씨는 “사건을 겪으며 곪을 대로 곪은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봤다”고 말했다.
전 목사의 성범죄 사실이 처음 교회 내에 조금씩 퍼진 건 2010년 7월이다. 한 방송사가 취재에 들어가면서다. 강간에 가까운 추행을 당한 여성 교인의 얘기를 들은 이가 제보를 한 것이었다. 문제가 커질 조짐이 보이자 전 목사는 2010년 말 “교회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실이 있어 사임서를 제출했다”며 “저로 인해 상처받은 피해 성도님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힌 뒤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대학청년부 간사였던 권대원씨는 “전 목사가 왜 사임하는지, 범했다는 죄가 어느 정도였는지 당회(교회의 의회)의 공식 발표가 없어 교인들은 알지 못했다”며 “당회에서 진상조사와 발표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1년 여가 지나도록 무소식이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교회 내에서 “알고 보니 ‘꽃뱀’이 전 목사를 유혹한 거였다더라” “이단이 전 목사를 의도적으로 음해한 거라더라”는 황당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참다 못한 교인들이 나섰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을 지낸 이진오 더함공동체교회 목사와 함께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제보를 받고 교회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카페에는 전 목사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 권씨는 “셀 수 없이 많은 피해 사례가 올라왔고 그 중 심각한 성추행만 15건”이라고 말했다.
‘숨바꼭질’에는 그 중 동의를 받은 8명의 진술을 실었다. 당회장실에 부른 뒤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마사지 해달라고 요구한 경우,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갔더니 문을 잠근 뒤 가슴과 엉덩이를 만진 경우를 비롯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성추행 사례가 폭로됐다. 피해자 다수는 이 같은 성추행을 여러 번 당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왜 즉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권씨는 “목사는 곧 ‘영적 아버지’라는 잘못된 신격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전 목사는 교인이 100명도 안되던 삼일교회에 부임해 교인 2만명의 대형 교회로 키운 ‘스타 목사’였다. 지유석씨는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인 목사에 맞설 용기를 감히 갖기 어려운 게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 목사가 사임하기 전부터 블로그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지씨에게 교인들은 “목사님 흔들지 말라”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되레 비난하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여성 교인 대다수는 교회를 떠났다.
이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2년 6월부터 삼일교회 교인들은 전 목사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평양노회에 전 목사의 목사직 박탈을 요구하는 면직청원을 하고 있다. 전 목사는 2012년 5월부터 서울 마포구에 한 교회를 개척해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권씨는 “그간 네 번이나 노회에 면직청원서를 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며 “다음달 예정된 노회를 앞두고 다섯 번째 청원서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겪으며 두 사람이 새삼 느낀 것은 ‘목사가 곧 하나님’이 돼 버린 교회의 현실이다. 지씨는 “전 목사의 범죄는 일반 기업이나 사회였다면 엄히 다스렸을 중범죄”라며 “아무런 회개나 사과, 처벌 없이 목사 직을 유지하고 있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씨는 “개신교의 뿌리인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성직이나 계급의 권위를 부인한 만인제사장주의”라며 “지금 개신교는 본령을 잃고 신학적 근거 없는 목회자에 대한 맹신이 깊어졌다”고 지적했다.
책 제목 ‘숨바꼭질’도 한국 교회의 현실을 꼬집은 말이다. 두 사람은 “교인은 목사라는 권위에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고, 교회는 가해 사실과 가해 목사를 가리기에 급급하고, 교회는 다시 교단 뒤에 숨는 숨바꼭질을 보는 것 같았다”며 “침묵하고 방관한 모두가 공범자”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이 책이 목사 성추행에 대처하는 일종의 매뉴얼이 되길 바란다. 책의 수익금도 교회 내 성범죄 피해자 지원에 쓸 계획이다. 지씨는 “교회도 엄연한 조직인데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매뉴얼조차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며 “이 책이 교회 성폭력을 공론화하고 지원기구를 만드는 초석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