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문이 열리다… 여성 일자리 공장·사무실·상점으로 무차별 확산
러시아선 전쟁영웅 탄생… 평범한 농촌 아낙 보치카료바, 여성결사대대 300명 훈련시켜
여성운동 밑거름으로… 자유 맛본 여성의 사회 진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전쟁에는 역설이 깃들어 있다. 지배자들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전쟁을 벌이지만, 체제의 흥망이 걸린 전쟁에서 이기려면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체제가 평시에는 용납하지 않던 급격한 변화가 전시에 일어나게 된다. 그런 사례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들 수 있다. 이 전쟁 기간에 체제가 승리를 위해 추구한 혁신의 “부수적” 수혜자가 여성이었다. 세계대전기의 여성을 살펴볼 시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경로에 들어선 유럽에서도 여성이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무척 힘들었다. 영국 제국주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여자의 본분은 “현모양처의 의무를 다하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이라는 통념이 워낙 강고해서, 사회활동을 하려는 여성은 눈총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활약하면서 여성의 사회활동 영역을 넓힌 것도 크림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나 가능했지 평상시였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가 주도로 남성 대신 여성이 생산현장에
1914년에 일어나 50개월 동안 총력전으로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각 교전국은 승리를 위해 국민 전체를 짜내듯 동원했다. 전쟁이 터지자 국가는 고깃배가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싹 쓸어가듯 젊은이를 모조리 군대로 데려갔다. 전쟁 개시 보름 만에 프랑스 정부는 남성 370만명을 동원했다. 프랑스에서 경제활동인구 3분의 2가 군복을 입었고, 이 가운데 절반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공장과 사무실, 들판과 농장에서 젊은 남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총력전 체제에서 생산은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하다. 누군가가 생산 현장의 빈 자리를 메워 물자를 만들어야 한다. 빈 자리를 누가 차지했을까? 여성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자국 여성에게 전선으로 떠난 남성의 빈 자리에 서서 일하라고 다그쳤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남성 군인이 많아야 했고, 그러려면 예전에는 남성이 하던 직종을 이제는 여성이 도맡아야 했다. 상점 판매원, 은행원, 운전수, 차장, 철도원, 집배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드물지 않게 되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서민 여성에게 허용된 직종이 기껏 부잣집 하녀 정도였던 전쟁 이전과 비교하면,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변화가 몇 해 사이에 일어난 셈이다.
이런 변화가 두드러진 분야가 군수 공업이었다. 거친 쇠붙이를 다루고 복잡한 기계가 가득 찬 군수공장은 남성의 배타적 영역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1914년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들은 직물 공장이나 식료품 공장에 몰려 있었다.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거나 다치는 가운데 막대한 수의 보충병이 계속 필요한 상황에서 징집의 물결은 군수 공업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았다. 군수업체 남성 노동자도 전선으로 떠났다. 예를 들면,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한 대형 군수공장에서 노동자 절반이 징집되었다.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부랴부랴 여성을 모집해서 선반을 돌려 금속을 절삭해야 했다. 아녀자가 공장에 들어서는 데 반대하는 고참 남성 숙련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노동력 부족사태를 맞이해서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프랑스 군수공장에 고용된 여성 노동자가 1914년 7월에는 21만명이었는데, 1918년에는 91만명이었다.
비슷한 변화가 농촌에서도 일어났다. 먹지 않고 싸울 수는 없다. 곡식을 키우고 가축을 돌보던 장정이 전선으로 떠난 탓에 일손이 태부족이었다. 누군가는 그들 대신에 일을 해야 했다. 영국 사회는 아가씨들을 여성농촌부대(Women’s Land Army)로 편성해서 시골로 보내 들일과 농장일에 투입했다. 농촌의 성별 분업도 변했다. 러시아 농촌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일을 많이 했지만, 한 해 농사 계획을 세우거나 쟁기질할 곳을 정하는 일은 예전에는 남자가 할 일로 여겼다. 하지만 전쟁 통에 장정이 사라지자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따질 겨를이 없었고, 남자가 하던 일을 자연스레 여자가 하게 되었다.
여권신장 기회 삼자는 움직임도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노동인구 성별 구조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국가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그토록 미온적이었던 위정자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후방의 여성 노동력을 동원해서 사회 각 분야에 골고루 배치해 전쟁수행기구의 효율을 높여 전선의 승리를 확보하려고 안달이었다.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가 1915년 7월에 조직한 집회에서 로이드 조지 재무장관은 “여성이 없다면 승리는 늦어질 것이고 늦어진 승리의 발자국은 피의 발자국을 뜻한다”고 선언하면서 여성을 전쟁수행노력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프랑스 육군의 조프르 총사령관은 “여공이 공장 가동을 20분만 중단해도 연합군이 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예 군대에 들어가서 여성의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도 있었다. 여성계 일각은 전쟁을 여권 신장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의 한 여성 신문은 1914년 8월 17일에 “여성이여, 조국에겐 여러분이 필요하다. 국민의 의무를 다하자”고 호소하며, 여자로 구성된 보조 군대를 편성하자고 정부에 건의했다. 여성이 전쟁에 동참해 승리에 이바지하면 국가가 반대급부로 여권 신장을 허용하지 않겠냐는 계산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는 9만명, 독일에서는 1만7,000명, 미국에서는 1만2,000명에 이르는 여성이 자국군의 보조 인력으로 일했다.
군대라는 남성만의 배타적 공간에 과감히 들어선 여성이 가장 많은 나라는 러시아였다. 전투원이 되려는 러시아 여성이 적지 않았다. 1914년부터 1917년 5월까지 개별적으로 군문에 들어서 군인으로 활약한 여성이 1,000명이나 됐다. 예를 들어, 코사크 출신 마르가리타 코콥초바란 여인은 기마정찰대원으로 적진을 누비며 전투를 치렀다. 14세에 기병대원이 된 마리나 유를로바라는 소녀는 최고 영예인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여성 전투부대로 남성 압도한 보치카료바
마리야 보치카료바라는 러시아 여인이 역사가의 관심을 끈다. 여느 농촌 아낙과 다를 바 없이 힘든 일에 시달리고 남편에게 학대 받던 보치카료바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를 찾아가 자기를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본인은 입대 동기로 애국심을 내세웠지만 팔자를 고칠 기회를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기적처럼 군인 자격을 얻은 보치카료바는 비아냥대는 남자 전우를 의식해서 위험한 임무를 자청했고, 총알이 빗발치는 무인지대에 쓰러져 있는 전우를 혼자서 구출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천생” 군인인 보치카료바는 무공훈장을 받았고 부사관으로 진급해 소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영웅이 된 보치카료바는 더 나아가 여자로만 전투부대를 편성해서 실전에 나서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정부 인사를 만나 여군 부대 계획을 선전했다. 정부는 처음에는 그 계획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의 편이었다. 1917년 이른 봄에 혁명이 일어나 제정(帝政)이 무너진 뒤 들어선 임시정부가 보치카료바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내외 위상을 강화할 전선의 승리가 절실한 임시정부는 독일군에 총공세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패전이 거듭되고 권위 구조가 무너지면서 러시아군은 와해 직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여성부대 창설을 허용했다. 보치카료바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5월 21일에 여성부대를 홍보하면서 “이 중대 시점에 남자들이 제 의무를 깨닫도록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연설했고, 실무자에게는 “사내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여군이 적과 용감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어 전쟁에 지친 남성 병사의 전투 의욕을 북돋는 것이 목적이었음이 드러난다. ‘사내들이 오죽 못났으면 계집들이 총을 들고 싸우겠냐?!’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여성결사대대라는 이름 아래 여성 2,000명이 모여들었다. 보치카료바는 이들을 혹독하게 조련했고, 훈련생이 조금이라도 여자처럼 굴면 바로 내쫓았다. 300명이 끝까지 남았다. 드디어 여성결사대대가 벨라루스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 7월 9일에 내려진 공격 명령에 남성 병사들이 항명하는 와중에 여성결사대대가 뛰쳐나가 돌격했다. 적 참호를 점령하고 독일군 장교와 병사 여러 명을 사로잡았다. 여군에게 당했음을 깨달은 포로들은 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무슨 창피냐?!” 여성 병사들은 수치심에 떠는 독일 장교가 자결하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묶었다. 그러나 그 뒤로 여성결사대대는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고 볼셰비키 혁명 뒤에 해체되었다.
전후도 여성 사회진출 물길 거스르진 못해
제1차 세계대전이 여성해방의 시공간만은 아니었다. 여성이 전후방에서 전쟁수행노력의 한 축을 떠맡았지만, 전시에 사회 전반에서 사나이다움이 더욱 강조되면서 여성의 입지가 늘기란 쉽지 않았다. 군대에서 여성은 그야말로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여성결사대대의 목적은 기껏해야 남성 병사를 자극하는 데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남성이 직장으로 돌아오자 여성은 밀려났다. 전시에 여성을 추켜세우던 언론도 이제는 예전 질서로 돌아갈 때라며 여성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옛날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시에 일시적으로나마 허용된 사회 진출은 여성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고 여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예전에는 여자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몰랐죠.”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한 여인은 전후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이제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어요.”
류한수 상명대 교수ㆍ유럽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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