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건방을 오가며 24년간 책상 앞에서 끙끙댔지만
창작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몰라
창작 활동 하기로 작정한 당신
어이없는 작품이든 맞춤법이 틀렸든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 돼 있어
창작의 비밀을 캐러 함께 떠납시다
간단한 정정으로 시작하겠다. 제목을 달기 전에 여러 번 망설였다. ‘작업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고 며칠 전에 사고가 나갔지만 그새 마음이 또 바뀌었다. ‘작업’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어감을 버리는 건 안타깝지만 앞으로 쓰려고 하는 글의 내용은 ‘창작의 비밀’ 쪽에 가까울 것 같다. 거 참, 거창한 제목이다. 창작의, 비밀이라니! 창작에 비밀 같은 게 있을까. 없으면 어쩌나. 근심이 앞서지만 일단은 비밀을 캐내는 걸 목표로 삼고 싶다.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작가가 될 마음을 먹었으니 24년 동안이나 뭔가를 만들어보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서 끙끙대고 있는 셈이다.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흘려버린 밤이 몇 날인지, ‘난 결국 재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좌절한 새벽이 또 몇 날인지 모른다. 또 어떤 날은 글이 너무 쉽게 잘 써져서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이러다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쓰는 것은 아닌가, 건방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새벽과 밤과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과 좌절과 건방들이 모여서 24년이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끙끙대고 있는데도 여전히 창작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좀더 쉬운 길은 없는지, 남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창작의 비밀 같은 게 있지는 않은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이 연재를 시작하고 있다.
가끔 특강을 요청 받을 때가 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지, 그런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당혹스럽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도 않은 데다가 24년이나 책상 앞에서 끙끙대고 있는 주제에 해줄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게 많을 리 없다. 책상에 엎드려 자면서도 침을 흘리지 않는 법이나 의자를 젖히고 잘 때 유용한 목 베개나 땀이 차지 않는 방석을 추천해줄 수는 있겠지. 하하하. (이것도 나중에 추천해 주고 싶다. 목 베개나 방석의 선택 방법도 창작의 비밀에 속한다.)
자주 거절하지만 어쩌다 특강을 갈 때가 있다. (특강을 가기로 결정하는 시기는 의외로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다.) 막상 가보면 반갑고 놀랍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앞에 앉아 있는 게 반갑고, 내게 궁금해 하는 것이 뜻밖에도 간단하고 단순하다는 데 놀란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은 “주로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나요?” 같은 궁극적인 질문이거나 “하루에 글은 몇 시간 쓰세요?” “쉴 때는 어떤 일을 하세요?” 같은 생활형 질문들이다.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 느껴지는 질문들이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와 같은 질문인 셈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 질문들에 잘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멋있는 말을, 실용적인 말을, 더 정확한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말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 답답함이 이 연재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말보다는 글이 조금 더 편하다.
매튜 퀵의 소설 ‘용서해줘, 레너드 피콕’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상 만사가 모두 마음에 안 드는 18살 불만투성이 주인공 레너드 피콕은 현대 미술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미술관에서 이보다 더한 걸로, 새하얀 캔버스 위에 가늘고 붉은 줄 하나를 세로로 찍 그어놓은 작품도 봤다. 실버맨 선생님에게 그 붉은 줄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건 나도 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 했잖아.”
주인공 레너드 피콕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얇고 희미한 붉은 줄 하나일 뿐이지만 그걸 긋는 것과 긋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난하기는 쉽지만 선을 긋는 건 어렵다. 비꼬는 건 간단하지만, 첫 문장을 시작하는 건 어렵다. 창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번이라도 창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수영을 갓 배운 사람에게 박태환의 경기가 이전과 달라 보이듯 한 번이라도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사람에게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육박해올 것이다. 붉은 선을 한 번 긋고 나면 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그을 수 있을지, 남들은 어떤 선을 긋는지 살펴보게 된다.
24년 동안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다고 했지만 창작의 쾌감 역시 잘 알고 있다. 20매 분량의 짧은 에세이를 쓴다고 해보자. 시작은 늘 힘들다. 원고지 20매가 아득해 보이고 과연 살아서 저 황무지 같은 빈칸들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한다.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감탄사 같은 것으로 시작해볼까. 아니면 무덤덤한 단문으로 시작해볼까. 소설처럼 가상의 주인공으로 시작해볼까.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다음 일단 시작하고 원고지 10매가 넘어갈 때쯤이면 몸 어디에선가 이상한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한다. 정말 묘한 기분이다. 내 손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보다 글이 나를 통과해서 나오는 것 같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오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통과한 문자들이 컴퓨터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쾌감은 쉽게 잊을 수 없다. 글쓰기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을 넘어서면 엄청난 쾌감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창작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4년의 한국에 살면서 나는 자주 우울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점점 더 험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 험해지고 거칠어져야만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거칠어지다가 우리는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문득 돌아봤을 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모래뿐이지 않을까. 뭔가 중요한 걸 꽉 움켜쥐고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쩌면 바스라지는 흙덩어리 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좀더 창작에 몰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거칠어질 수 없다. 강해질 수는 있어도 험해지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창작’이나 ‘창의성’, ‘상상력’ 같은 단어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먼저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만드는 일은, 현실을 껴안는 일이다. ‘창의적 인간’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잘못된 것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창의성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의성은 우리에게 가장 활기찬 삶의 모델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했다. 나 역시 백 퍼센트 동의한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2014년의 한국이야말로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할 시점이고, 창작해야 할 시점이고, 서로가 만든 창작물을 들여다봐주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가 만든 창작물을 들여다보면서 덜 거칠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소설이건 노래이건 그림이건 시이건 단순한 이야기이든 상관 없다. 무언가를 만들고, 결과물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보면 무언가 변할 것이다.
특강을 갔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사람들은 뭔가 창작하는 걸 어렵게 생각한다. 창작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도 붉은 줄을 그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붉은 줄을 그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과연 이 줄을 내가 그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어보면 일단 재미있다. 누구나 붉은 줄을 그을 수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 혼자 하긴 미안해서 (흐흐흐, 혹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 나 혼자 하기엔 억울해서) 더 많은 사람이 창작의 마술에 빠져들기를 바라고 있다.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는 “창의성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우리를 벽에 부딪치게 만든다”고 했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 스스로 벽을 세우는 셈이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특별하고, 시간과 함께 만든 창작물은 모두 특별하다.
어릴 때의 미술 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나무를 그리라고 했다. 나는 열심히 나뭇가지를 그렸고, 나뭇잎을 그렸다. 꼼꼼하게 그렸다. 새들이 날아와서 부딪치는 나무를 그리고 싶었지만, 결과물은 도화지에 모이를 던져놓아도 더럽다며 새들이 도망갈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선생님은 다음날까지 그려오라고 숙제를 내주셨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형이 미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 저녁 형은 수채화 물감과 붓을 들고 와서 내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묽은 물감을 묻힌 수채화 붓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툭툭 건드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녹색의 이파리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빈틈없이 녹색을 칠해 넣던 나의 노력이 어이없을 정도로 나무는 아름다워졌다. 다음날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고, (칭찬하던 선생님이 무안해질까봐 형이 도와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림에 대해서 뭔가 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그림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창작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무조건 열심히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창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전에는 “작가님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있어요?”라는 질문이 어처구니없게 들릴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 막막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어이없는 질문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한 질문도 할 수 있다. 음, 예를 들면, “노트는 줄이 있는 걸로 쓰나요, 아니면 줄이 없는 걸로?” 혹은 “손톱을 깎을 때 왼손부터 깎나요, 오른손부터 깎나요?” 혹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깨가 많이 아플 텐데 안마기 같은 것도 사용하시나요? 어느 회사 제품이 좋아요?”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이번 주부터 격주로 창작의 비밀에 대해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어쩐지 절대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기분이다.)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뮤지션을 만날 때도 있을 것이고, 무용수나 화가나 소설가나 시인을 만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창작이란, 장르를 불문하고 모두 통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가들은 평생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로 연재의 프롤로그를 마치고 싶다. G.K.체스터튼의 말이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서투르게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것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가 만든 창작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조차 놀라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의 그 어느 조직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한다. 하찮다고 느껴지는 걸 만들었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어이없는 작품이 나왔더라도, 맞춤법이 몇 번 틀렸더라도, 그림 속 사물들의 비율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노래의 멜로디가 이상하더라도, 나는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건투를 빈다.
김중혁ㆍ소설가
사진 캡션
대학교 2학년 작문 시간에 쓴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정성스럽게 쓴 것 같긴 하다. 선생님은 빨간 펜으로 “열심히 정진해서 작가의 길을 꿈꾸어 보세요”라고 적었고, 나는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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