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담당관 두고 특별예산 편성… 심사위원 만나려 브로커 고용도
DJ 평화상 유력후보 떠오르자 대사관 대신 국정원이 전담
노벨상 심사기관이 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각국 대사관은 노벨상 전초기지로 불린다. 외교라는 고유 역할 외에 노벨상 수상 전략이 특별임무로 주어지는 게 보통이다. 두 나라 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들은 “세계가 노벨상 열병을 앓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 곳에서 근무한 우리나라 전직 외교관 5명에게서 세계와 한국의 노벨상 열병을 들어봤다.
● 노르웨이 스웨덴 대사관은 전초기지
노벨상 수상이 국가 위상과 직결되다 보니 모든 나라가 치열한 수상 공략을 편다. 지금까지 19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이 대표적이다. 특별예산 편성뿐 아니라 현지 대사관에 노벨상 담당관까지 두고 외교력을 총동원한다.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A 전 외교관은 “노벨상이 엄격한 심사로 진행된다고 하지만 암암리에 흑막 홍보까지 진행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포함해 신흥국들은 노벨상 수상을 국위를 선양할 기회로 여기고 홍보 이상의 방식으로 공을 들인다”고 전했다. 노벨 심사위원 접촉을 위해 브로커를 고용하는 대사관도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초 퇴임한 B 전 대사는 “외교관들도 노벨상 수상과정을 잘 알지 못해 브로커에 의존한다”며 “민감한 사안이라 극도로 조심하기 때문에 실체가 잘 드러나진 않는다”고 말했다. 브로커들은 후보 공적 만들기, 자금 유치를 통한 수상 방법 등을 조언한다. B 전 대사는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노벨상 심사위원이 소속된 개별 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며 “하지만 현지에선 이를 비난하기 보다 당연시 여긴다”고 로비성 홍보가 일반화된 모습을 지적했다.
● 한국도 정권마다 노벨스캔들
그렇다면 2000년 평화상을 배출한 한국은 이런 로비 의혹에서 자유로울까. 우선 한국은 문학 경제 물리 등 스웨덴이 결정하는 노벨상에 대해선 현지 대사관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선정하는 노벨 평화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대통령이나 정치인 등 고위급 인물이 평화상 후보로 몰려 있다 보니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전략이 수립되고 대사관도 동원된다. 현지 대사관이 외교력을 쏟아 부은 대표적 인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꼽힌다. 전직 외교관들은 이들이 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10여 년 간 노르웨이 대사관은 노벨상 만들기 외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전했다. 권영민 전 대사는 “대사관 업무 가운데 20% 이상을 평화상 수상에 할애했을 만큼 관심을 둬야 했다”고 회고했다.
● 전두환의 노벨상 플랜
과거 정권들은 평화상을 정하는 노르웨이 대사에 유독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전 전 대통령 시절엔 육사 11기 동기생인 고(故) 송성한 전 대사를 85년부터 임기 말까지 노르웨이 대사로 근무토록 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노벨 평화상 플랜을 가동, 송 전 대사를 노르웨이 대사관으로 보내는 한편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북한에서 허담 노동당 비서가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송 전 대사는 당시 현지 외교관들에게 이 같은 자신의 임무를 소개하고 전폭적인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발생한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KAL기 폭파추락 사건 등에 평화적으로 대처해 한반도 안정유지에 공헌했다는 명분으로 영국ㆍ서독 의회에 의해 88년 평화상 후보로 정식 추천됐다. 만약 전 전 대통령의 노벨상 플랜이 성공했더라면 2000년 DJ의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상 수상의 국면은 달라졌을 수 있다.
● YS도 평화상 추진
YS정부는 94년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 서명으로 북핵 문제가 일단락되자 한반도 긴장완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판단, 평화상 수상을 추진했다. 최대화 전 대사가 95년 1월 평화상 관련 활동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소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노르웨이 정부는 부임 1년 만에 최 전 대사가 소환되자 한국정부에 항의, 외교적 마찰까지 빚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월드컵 유치에 나섰던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는 “노르웨이 인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대사 소환을 이유로 오히려 항의했다. 외교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분위기였다. 한 표가 아쉬운 마당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YS정부는 현지 분위기로 볼 때 YS보다는 DJ가 노벨상에 더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꾸로 DJ의 평화상 수상을 막기 위한 역로비를 폈다는 의혹을 받는다.
● YS정부, DJ 노벨상 막아라
당시 현지 책임자였던 권영민 전 대사는 역로비 문제에 대해 “어찌 한 나라의 대사가 정치 지도자를 비방할 수 있겠는가. 모두 오해다. 이미 DJ는 유력한 후보라서 방해로비를 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로 인해 DJ정부 출범 때 곤욕을 치르게 된다.
청와대 의전수석으로 내정됐다 전격 취소된 것이다. YS를 평화상 수상자로 만들기 위해 DJ를 음해했다는 보고가 청와대에 들어 간 결과였다. 실제 YS 측이 수상 확률을 높이기 위해 DJ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는 역공작을 편 정황이 없지는 않다. 당시 DJ는 인권 향상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87년 이후 매년 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곤 했다. 99년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박경태 전 대사는 “DJ의 평화상 수상 무렵 방한한 노벨 심사위원들에게서 ‘YS정부 때 DJ에게 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 DJ 노벨상에도 정부기관 동원
98년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양세훈 전 대사는 회고록 <장춘에서 오슬로까지>에서
DJ 홍보외교를 소개했다. 그는 DJ의 경제위기 극복을 담은 보고서를 노벨위원회와 정부, 언론에 전달하고, 대사관저로 장관, 의원, 언론인, 학계인사, 기업인을 초대했다. 노르웨이 총리도 만나 “노르웨이는 인도주의를 가장 중시하기에 남북대화가 진전돼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노벨위원들을 방한시켜 금강산 관광, 소떼 방북 모습을 실제 경험토록 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양 전 대사는 “한국인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게 민족의 영광이라고 생각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를 이은 권 전 대사는 “DJ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종의 환경조성만 하면 수상이 유력하다는 현지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고 했다. 나중에 이 ‘돌파구’란 ‘남북정상회담’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는 “DJ가 유력한 후보였고, 공적을 세우려는 국내세력도 많아 대사관은 점차 노벨상 (수상 작전) 중심에서 멀어져 갔다”고 회고했다. DJ가 유력 후보가 되자 DJ 주변인사, 국정원 등에서 전략적으로 노벨상 업무를 전담했다는 얘기다. 권 전 대사는 DJ가 평화상을 수상하기 1년 전인 99년 2월 박경태 대사로 교체된다. 박 전 대사는 “내가 부임했을 때는 이미 대사관 차원이 아닌 그 위에서 고차원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던 터라 어떠한 관련 업무도 한 기억이 없다”며 “2000년에는 알려진 것과 달리 대사관 차원에서 역할은 극도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 고은 시인, 실패이유
이처럼 노르웨이 대사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평화상 관련 정보, 현지 분위기, 아이디어 등을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다. 자국 지도자 치적 홍보와 함께 심사위원들에 직접 접촉까지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C 전 대사는 “심사위원의 경우 개인적으로 만나 국내에서 요구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극도로 조심스럽게 진행해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비 활동이 지나치거나, 외부에 공개될 경우 역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현지 대사를 지낸 이들은 단적인 예로 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고은 시인을 든다. D 전 대사는 “고은 시인이 유력 후보임에도 문학상을 번번이 타지 못하는 것은 번역작업 등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겠지만 오히려 너무 홍보가 이뤄져 위원들의 반감을 산 게 한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심할 정도로 한국 각계에서 홍보가 이뤄지다 보니 노벨 심사위원 사이에서 고은 시인을 평가 대상에 올리기 꺼려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고 덧붙였다. 노벨상 홍보는 좀더 세련되고 은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직 외교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 2014년 노벨상 발표(한국시간)
생리의학상 6일 오후 6시 30분
물리학상 7일 오후 6시 45분
화학상 8일 오후 6시 45분
평화상 10일 오후 6시
경제학상 13일 오후 8시
문학상 9일 예상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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