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이덕일의 천고사설] 북벌과 전시작전권

입력
2014.10.26 20:00
0 0

광해군 15년(1623)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은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에 반대한다’는 숭명반청(崇明反淸)이었다. 서인들은 쿠데타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급격히 친명반청 정책으로 전환했고, 청 태종은 인조 5년(1627) 1월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조선은 평소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명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을 믿었지만 그는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마자 신미도(身彌島)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가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모른다”고 답변했고 인조가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외교정책을 이념화해서 자국의 군부(君父)를 쫓아낸 인조정권의 현실이었다. 정묘ㆍ병자호란 이후 서인들은 청나라로 기운 대륙의 정세를 애써 부인하면서 설치(雪恥ㆍ부끄러움을 씻는 것)를 외쳤다. 그래서 9년 동안 인질생활 끝에 보다 개방적인 세계관을 갖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두 달만에 독살하고 법적인 계승권자였던 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반청론자인 효종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서인들은 말로만 북벌(北伐)을 외치는 군주가 필요했는데 효종이 진짜 북벌을 단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정력을 다해서 북벌군을 길러냈고 재위 6년(1655) 9월에는 한강의 노량진 백사장에서 1만3,000여 명의 정예 군사들이 열병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 열병식에 대해 “서울의 남녀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효종실록 6년 9월 29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문신들은 “청과 분쟁거리가 된다”면서 반대했다. 서인들을 중심으로 문신들이 북벌을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자 효종은 재위 10년(1659) 북벌을 반대하는 문신들의 대표격인 송시열과 독대를 감행해 “정예 포병(砲兵) 10만 명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길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라면서 북벌 동참을 설득하기도 했다. 북벌군주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급서하고 현종이 즉위한 후 서인들은 말로는 북벌, 속으로는 반대라는 이중정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현종 15년(1674) 7월 진짜 북벌론자인 백호(白湖) 윤휴(尹?)가 북벌을 주창하는 비밀 상소문인 밀소(密疏)를 올리자 다급해졌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는 현종에게 “괴이한 소장(訴狀)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고, 현종이 사실이라고 답하자 정지화는 “그러한 소장을 승정원이 무엇때문에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필시 국가에 큰일이 발생할 것입니다”(백호 연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북벌을 주창하는 ‘대의소(大義疏)’를 올린 윤휴에 대해 서인들은 세상물정에 어둡다면서 “오활(迂闊)하다”(숙종실록 1년 1월 11일)고 비난했지만 윤휴의 북벌주장은 오활한 것이 아니었다. 현종 14년(1673) 운남(雲南)ㆍ복건(福建)ㆍ광동(廣東) 등지를 장악하고 있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등 세 한인(漢人) 출신 번왕(藩王)들이 군사를 일으켜 양자강 이남이 쑥대밭이 되는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윤휴는 “우리나라의 정예군사와 강한 화살(勁矢)은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여기에 화포와 조총까지 곁들이면 진격하기 충분합니다”(백호전서의 ‘갑인봉사소(甲寅封事疏)’)라면서 북경으로 진격하면서 대만을 장악한 정경(鄭經)을 비롯한 복명반청(復明反淸) 세력과 연합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청나라에서는 오삼계 등이 차지하고 있던 삼번(三藩)의 철폐를 뜻하는 철번(撤藩)을 주장했던 대신들의 목을 베어 오삼계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료까지 있을 정도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효종이 친자식처럼 아끼며 기른 정예 조선군이 북상했다면 청나라가 무너졌을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북벌은 집권명분에 불과할 뿐 실제 북벌은 간이 툭 떨어지는 공포였을 뿐이다.

최근 미국과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협상을 보며 서인들이 떠올랐다면 필자의 오독일까? 2011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308억 달러)는 북한(9억2,000만 달러)보다 33.4배 많다고 한다. 인구나 경제력으로도 북한은 남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핵무기 운운하지만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므로 이 또한 명분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싸울 자신이 없다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게다가 대한민국은 징병제를 실시하는 흔치 않은 나라다. 효종은 재위 6년(1655) 9월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ㆍ인조 부친 원종 부부의 릉)에 참배하러 가다가 노량진(露梁津)에서 군사 훈련을 보고 “이런 군사와 말이 있는데 제 길을 가게 통솔하지 못해서 한갓 쓸모없는 군졸이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효종실록 6년 9월 28일)라고 한탄했다. 효종이 지금의 협상 모습을 봤으면 더 크게 혀를 찼을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