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시민들이 무슨 죄냐, 차라리 통한(痛恨)함으로 개명하자.”
얼마 전 끝난 올해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의 최대 이슈는 방산비리였습니다. 관련 질의 과정에서 ‘통영함 납품비리’가 하루도 빠짐 없이 의원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방위사업청 실무자들이 특정 업체에 유리하도록 음파탐지기(HMS), 수중무인탐사기(ROV) 등 통영함의 주요 장비 시험성적서를 조작하는 바람에 작전요구성능(ROCㆍ작전 현장에서 요구되는 능력)에 한참 못 미치는 장비가 납품됐기 때문이죠. 통영함이 ‘방산비리의 대명사’로 인식되면서 애꿎은 통영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에 이르자 국정감사장에서 통한함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까지 나온 겁니다.
국산 기술로 건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상함 구조함인 통영함은 애초에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으며 탄생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평택함과 광양함은 1996년 미 해군이 퇴역시킨 구조함을 우리 해군이 재취역한 것으로 작전수행능력이 한참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두 구조함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구조작전에 투입됐지만 수중탐지장비가 없고 노후한 탓에 효과적인 구조활동을 벌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해군의 안정적인 작전 지원은 물론 각종 해난사고 시에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도록 통영함을 건조하게 된 겁니다. 기존 구조함보다 규모도 크고 최첨단 구조장비까지 갖춰 최대 수심 3,000m까지 탐색할 수 있게 한데다 신속하게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 이동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납품 비리로 해군에 인도가 늦어지면서 결국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구조에도 투입되지 못하게 됩니다.
통영 시민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통영함’이란 이름은 어떻게 붙여지게 됐을까요. 통영은 6ㆍ25전쟁 당시 해군과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으로 북한의 공격을 저지한 통영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조선시대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근거지인 한산도가 속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현장을 기리기 위해 최초의 국산 수상함 구조함에 통영함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통영함 외에도 각종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는 광개토대왕함, 율곡이이함, 청해진함, 울산함, 참수리정 등의 함정 이름에도 해군 나름의 일정한 기준과 규칙이 담긴 작명법이 있다고 합니다.
해군의 함명 제정기준에 따르면 작명은 크게 위인 이름, 도시명, 조류명 등 세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잠수함에는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 말까지 바다에서 큰 공을 남기거나 광복 전후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의 이름을 붙입니다. 1993년 실전 배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이나 최무선함, 손원일함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잠수함을 잡는 함정인 구축함은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 받는 왕이나 장수 등 호국인물의 이름을 따릅니다.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충무공이순신함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구축함 중에서도 ‘신의 방패’라 불리는 이지스함은 해군이 3척 보유하고 있는데 바로 세종대왕함, 율곡이이함, 서애류성룡함입니다.
그런데 주로 호국인물의 이름을 딴 다른 구축함과는 달리 이지스함에는 조선시대 정치가 이름이 붙어 눈길을 끕니다. 실제로 2007년 5월 진수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지스함이 ‘세종대왕함’으로 정해진 것을 두고 군 안팎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당초에는 조선 숙종 때 일본 어선의 독도 침범을 막아낸 안용복함이 유력했지만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세종대왕함으로 명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지스함인 ‘율곡 이이함’은 조선시대 병조판서(현재의 국방부 장관)로 왜적 침입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창한 율곡 이이 선생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정해졌고 세 번째 이지스함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권율 장군을 천거해 나라를 구하도록 한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는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지스(AEGIS)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가 그의 딸 아테나에게 준 방패를 의미하는데요, 이지스함은 미국에서 개발한 최신예 해상전투 체계인 이지스 시스템을 장착한 군함입니다. 200개의 목표를 탐지, 추적할 수 있고 동시에 20여개의 목표를 공격하는 등 이지스함 한 척으로 다수의 항공기와 전함, 미사일, 잠수함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꿈의 함정’으로도 불립니다. 하지만 우리 해군이 보유한 이지스함 3척은 모두 미 해군에서 인도한 것으로 우리는 아직 관련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6명이 전사한 2002년 제2연평해전의 가슴 아픈 사연이 함정명에 담긴 경우도 있습니다. 조류 이름을 딴 고속정(500톤 이하)인 참수리정 후계함 사업으로 개발한 유도탄 고속함(500톤 이상)에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윤영하함)과 고 한상국 중사(한상국함)등을 비롯, 해군 창설(1946년) 이후 전사한 인물들의 이름을 반영했습니다. 특히 차기고속함 사업이 연평해전을 계기로 시작된 점을 감안해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붙였다고 합니다.
함대를 각종 공격으로부터 경계, 방어하는 호위함에는 광역시도 명칭(울산함, 마산함)을, 기습적인 적의 공격에 대비해 연안 해상을 경계하는 초계함에는 중소도시 이름을 씁니다. 2010년 3월 26일 피격돼 해군 장병 46인이 희생당한 천안함이 바로 초계함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통영함, 평택함, 광양함 등 수상함 구조함에는 주로 공업도시 명칭이 붙고, 잠수함 구조함에는 해양력 확보와 관련된 역사적 지명을 따르기 때문에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가 활약했던 청해진의 이름을 따와 청해진함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각종 장비결함으로 속앓이를 하는 건 통영함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번 국정감사를 통해 광개토대왕함에서 20년 전 사양된 486컴퓨터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고 율곡이이함이 2년간 어뢰방어 불능상태였다는 사실도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각종 납품 비리와 장비 결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만큼 해군 함정명에 채택된 인물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축하 대신 걱정하는 마음을 전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국방부가 ‘클린 국방실천 TF’를 만들어 전력 증강 업무를 개선하고 방산 비리를 근절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이름에 먹칠 당한 도시나 호국인물들이 제대로 명예회복을 하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