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 동독 1989년 11월 9일 여행자유화 공보직원 실수로 "즉시 국경 개방"
갑작스런 통일에 당황했지만… 동독 군인 패자로 대하지 않고 같은 독일사람 돕는다는 마음가짐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은… 동독 경제 등 내부서 무너졌지만 통일과정서 미국·소련 역할도 중요
오는 9일로 독일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베를린장벽 붕괴가 25년을 맞는다. 동서독은 분단의 배경이나 분단 이후 사회 변화 과정에서 한반도와 다른 점이 많다. 하지만 남북한이 통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참고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가 독일 통일인 것도 분명하다. 독일은 어떻게 통일을 준비했고, 그 통일은 어떻게 왔으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통독은 무엇을 남겼는지 세 차례로 나눠 조명한다.
“서독은 통일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 통일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왔습니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부터 동독군 해체 작업을 주도하며 동서독 통일 작업의 실무를 맡아 본 서독 출신 요르크 쉔봄(77) 전 독일 국방차관은 “통일 후에는 더욱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많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독일 통일은 어떻게 물꼬를 텄고, 통일 과정에서는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을까. 통일 후 24년이 지났지만 독일이 여전히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지난달 말 서울안보대화 참석차 방한한 쉔봄 전 차관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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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는 그 직전 여행자유화를 발표한 샤보프스키 당시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이 실수로 “즉시 국경개방”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독일 통일은 다분히 우연의 산물인가.
“샤보프스키 말이 와전된 부분도 있지만 그런 와전을 불러일으킨 데는 동독 주민의 역할이 컸다. 동독 주민은 예전부터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그 일이 있기 오래 전부터 있었다. 샤보프스키의 발언이 와전되는 데는 동독 사람들의 힘이 적잖게 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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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은 지금도 회자되는 독일 통일의 유명한 에피소드다.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를 넘어 동베를린 정부가 여행자유화 원칙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장에서 당시 동독 여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샤보프스키는 이탈리아 통신사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자유화는 언제부터인가”. 샤보프스키는 “지금 당장부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동독 자유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생중계된 이 기자회견을 본 동베를린 시민 수 천명은 말 그대로 ‘당장’ 장벽 앞으로 몰려들었고, 장벽은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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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독일 통일까지 서독 정부와 시민의 역할은.
“장벽이 붕괴되고 나서 통일 독일에 적응하는 것을 사회주의 체제는 굉장히 버거워했다. 사실상 전체적으로는 붕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서독의 자본주의 화폐시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들이닥쳤고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변화들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바로 붕괴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통일이 될 때 서독 주민들은 동독 주민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왔을 때 서독 주민들은 자기 집의 문을 열었고, 카페를 개방해 커피와 빵을 나눠줬다. 동독을 마음으로 환영했다. 비단 베를린만이 아니고 국경을 접한 모든 서독 지역 작은 마을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베를린장벽은 동독 사람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지 서독 사람들이 직접 기여한 것은 실제로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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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군 해체를 주도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통일의 사후 처리에 해당하는 그런 부분들에서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많았다. 되도록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갖고 작업을 하려고 했다. 어떤 식이었냐 하면, 동독이 서쪽에 흡수되듯 통일됐지만 동독 군인을 패자로 대하지 않았다. 독일인으로서 같은 독일인을 도와준다는 마음가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군과 관련한 문제는 동독 군 체계에 적응돼 있던 군인들이 서독 군대에 입대해 전혀 다른 체계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독에서 장교로 은퇴하거나 전역한 사람들에게 서독 군 재입대를 많이 권장했다. 동독 군 체계에 익숙한 병사들을 서독에 익숙한 장교들이 지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통일 독일군에 동서독 모든 장교를 통합해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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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까지 동독 내부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동독은 주민들의 삶 등 사회 전반의 모습이 달라졌다. 사회주의 동독의 모든 사회질서가 무너졌다. 예를 들어 서독 상품들이 동독보다 훨씬 질이 좋다고 판단한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서 생산된 물건만 구매하는 상황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동독 상품은 팔리지 않고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에 가는 동독 주민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통일 이후 동독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가 실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실업자들이 서쪽으로 올 때 새로운 직장을 찾는 데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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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동ㆍ서독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 같다.
“처음 통일 됐을 때 경제 격차로 인해 동과 서가 잘 어울릴 수 있을 지 우려가 많았다. 당시 경제 격차는 60~70% 정도였다. 그 같은 갈등이 있었고 또 그런 격차가 이어질 것은 통일 되기 전부터 서독 사람도 동독 사람도 알고 있었다. 통일 이후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고 현재 격차가 갈등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서독 사람에 비해 소득이 적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다. 서독 사람에 비해 사회적 진출이 제한된다고 인식하고 있고 은퇴 후 연금에 차이가 있다는 데도 불만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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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은 오래 전에 하나의 국가로 통합돼 기능하고 있지만, 과거 분단 국가였다는 흔적은 지금도 뚜렷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여러 가지다. 베를린 동쪽의 가로등은 여전히 노란색 나트륨 증기등이지만 서쪽은 형광등이다. 동쪽 사람들이 읽는 잡지는 여전히 베를리너차이퉁이지만 서쪽은 슈피겔이다.
소득 격차 역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24년 전 통일이 되고 몇 주 만에 서베를린은 농촌화됐고 동베를린은 상업화했다. 물론 분단 30년 동안 서베를린은 너무 도시화돼 도시 외곽의 삶을 갈망했고, 동베를린은 도시적인 삶을 원했던 이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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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동서독이 지금도 통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때문에 서독은 많은 손해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사정이 나아졌을까.
“단호하게 ‘노(No)’다. 통일 한 지금이 통일을 하지 않았을 때 보다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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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북을 동서독과 비교해 볼 때 지금 남북한 통일 논의는 동서독 통일 논의 과정에서 어느 단계쯤 있다고 느끼는가.
“남북한 통일 상황을 알긴 하지만 정확히 어느 단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독일의 경우 통일이 너무 급작스러웠고 언제든 통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말하고 싶다. 서독은 주민은 통일을 염원했고 정부도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었지만 통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한 부분이 있다. 독일 통일에서는 동독의 내부적 요인이 중요했다. 하지만 실제 통일 과정에서는 그 만큼 중요했던 게 미국과 소련의 역할이다. 내부적인 것만 보지 말고 전체적인 것도 보면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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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주의 재평가 연방재단이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을 앞두고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독일 시민은 38%만이 동독과 독일 분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했고 과반인 54%는 동독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 젊은 세대가 전체 결과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대목이다. 응답자 중 14~29세 58%는 동독의 역사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안나 카민스키 재단 이사는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비록 젊은 세대들이 독일분단의 역사나 독재정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이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고 더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독일인들은 동독 붕괴의 원인으로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 정책(33%)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이어 동독의 경제 부실(22%) 동독 시민들의 저항(16%) 서방의 정책(11%) 동독의 야권운동(10%) 순이었다. 레이너 애플먼 재단 이사장은 “고르바초프가 없었다면 동독 내 반대세력의 저항은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라면서도 “시민들이 강제로 국경을 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들 없이 통일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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