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 "금융위기 때 메릴린치 투자 잘못"
기관 신인도 흠집 내온 악재 털고 자율성 확보해 투자 다각화 포석
정부 보유 외환을 위탁 받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KIC)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조원대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킨 메릴린치 투자 실패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국부펀드 기관으로서 외환시장에 미칠 영향을 들어 자산운용 내역을 비공개에 부치고 있는 KIC가 특정 투자 건에 대한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안홍철 KIC 사장은 24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KIC가 메릴린치에 투자한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통렬히 반성하며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말했다. 그는 “메릴린치 투자 실패의 뼈아픈 교훈을 되새겨 KIC가 세계적 국부펀드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미국 상업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2009년 메릴린치를 합병하면서 BoA 주식을 보유 중인 KIC는 BoA의 주가 및 영업실적 회복세를 들어 당분간 지분을 보유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메릴린치 투자로 KIC가 입은 손실률은 지난달 말 현재 35.82%, 금액으론 7억2,000만달러(8,000억원 가량)다.
이번 사과를 두고 KIC가 오랫동안 기관 신인도에 흠집을 내온 악재를 털어내려는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KIC는 2008년 초 당시 운용자산의 10% 수준인 20억달러(2조2,200억원)를 투자해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 지분을 사들였다가 금융위기 여파로 1년 만에 투자금액 절반을 날렸다. 2011년 손실 보전 차원에서 배당금 수익의 절반인 7,800만달러를 재투자했지만 재차 큰 손실을 봤다. KIC는 이로 인해 2010년 감사원 감사를 받았고 국정감사 때마다 책임 추궁 대상이 됐다.
내달 취임 1년을 맞는 안 사장에게도 메릴린치 투자 건은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사안이다.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활동하며 트위터 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방한 일로 취임 직후부터 야당의 퇴진 압력에 직면한 그는 국감을 통해 메릴린치 투자 결정 당시 KIC 감사로 배석한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곤경에 처했다. 그는 이날 트위터 비방 건에 대해 “선거에서 이기고 싶은 욕심이 과했다”고 사과하면서도, 부실투자 책임 의혹엔 “감사는 투표권 없이 발언권만 있었다” “당시 ‘주가가 충분히 떨어지지 않았다’ ‘투자액이 과도하다’고 주장하며 앞장서 반대 의견을 냈다”며 적극 해명했다.
KIC는 이번 사과를 자율성 확보의 지렛대로 삼아 투자 다각화에 본격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민간위원 6명 등 구성원 9명 중 8명이 외부인사인 운영위원회로부터 투자 결정의 전권을 넘겨받겠다는 것이다. 안 사장은 이날 “상법상 이사가 아닌 운영위원들이 투자 결정을 내리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KIC 고위관계자는 “메릴린치 투자 실패 이후 여러 번의 규정 개정을 거쳐 운영위 권한이 상당 부분 이사회로 이관됐지만 5억달러 이상 대체투자(부동산 등 비증권 자산에 대한 투자) 결정 권한은 여전히 운영위가 보유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KIC는 28개 국부펀드 기관이 참여한 공동투자협의체(CROSAPF) 차원의 대형 공동투자 계획을 내달 발표하고, 현재 운용자산의 10% 수준인 대체투자 규모를 내년 20%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사업계획을 이날 발표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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