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견고해지는 철옹성, 입시제도 바꿔도 백약이 무효
과도한 교육비에 출산율 저하… 국가적 손실로 이어지기도
대학서열화로 대표되는 학벌사회의 벽은 높고 두텁다. 역대 정부는 학벌 쟁취를 위한 학생들의 과열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수많은 교육 정책을 쏟아냈지만 학벌 구조는 갈수록 견고해졌다.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9명은 대학서열화에 큰 변화가 없거나(61.7%) 심화될 것(29.4%)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학벌사회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폐해가 누적되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잇따른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출제 오류로 인한 혼란 때문에 입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가 거센 지금이 대학서열화 문제를 개선하고, 진정한 전인교육의 방향을 논의할 적기라는 지적이다.
대학서열화 유지되면 어떤 개혁안도 무용지물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발간한 ‘통합고등기초대학 운영 방안연구 보고서’에서 “대학입시를 어떤 제도로 바꾸더라도 결과적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통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입시 과열이 입시제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서열화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상위권 학생들에겐 과열 경쟁이,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학업포기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입시로 인해 초중등 교육이 이미 황폐해진 것에 있다. 학생들의 자살률은 급증했고,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은 갈수록 정교해져 창의적 교육은 헛된 구호에 그치고 있다.
한때 고속성장의 원동력이던 교육이 이젠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까지 전락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인구감소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도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 때문”이라며 “워낙 교육비가 많이 드니 2~3명을 낳아 키우기 어렵게 됐고, 이는 국가 경제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생산 인구 하락, 노년층의 복지 비용에 대한 재정 부담, 주택버블 문제 등이 대학서열화로 인한 과도한 입시경쟁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개체수(인구)가 줄어 생물학적으로 죽어가는 나라”라며 “무조건 대학체제개편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대학서열화 고착시키는 구조조정 정책”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학교는 행복한 공간이 아니라,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공간으로 전락했으며, 점수따기 무한 경쟁으로 높은 평균 학업성취도에 비해 학습 흥미와 창의력은 저하되는 문제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학생의 꿈과 끼를 찾아서 살려주는 교육’을 정책목표로 삼고 인성과 창의성을 길러주는 교육으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구체화된 정책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따른 대학 구조조정은 오히려 대학서열화를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평가지표가 지방대와 하위권 대학에 불리하게 짜여지면서 기존 명문대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대학들의 서열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소장은 “대학 구조조정을 위한 현행 평가는 지방대에는 혹독한 반면 서울 지역 유명 대학들은 굳이 정부의 예산지원을 전제로 한 평가를 받지 않아도 상관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균형이 보인다”고 꼬집었다.
국립대학통합 등 대학체제개편론 부상
한때 학벌사회 타파를 위해 야권을 중심으로 서울대 폐지론이 거론됐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울대만 폐지한다고 해서 1등 대학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반론에 막혔다. 대신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 교수노조 등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통합국립대학 구축안이다.
이 안은 서울대를 제외한 전국의 국공립대학을 하나로 통합해 통합국립대학을 만들고, 사립대학은 정부 재정이 50% 이상 투입되는 정부책임형 사립대(공영사립대)로 바꿔 권역별로 육성하는 방식이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사립대학은 독립사립대학으로 남는다.
이렇게 되면 고등학생들은 졸업 후 직업대학(현 전문대), 권역별 공영사립대학, 통합국립대학, 독립사립대학, 서울대 등 5곳 중 하나를 선택해 진학하게 된다. 통합국립대에서 1~2년 공부한 뒤 서울대로 진학할 수 있는 길도 열어둔다. 다만 통합된 국공립대학의 수준이 수도권 유명 사립대학 수준으로 향상돼야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무상교육 수준의 비용으로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훈 교수는 “고등교육에 국내총생산(GDP)의 1.1%를 투자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교육공약이 이행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통합국공립대에 공동입시를 도입하고, 인사ㆍ행정 기능을 통합관리해 공동 대학원제를 운영하면 미국 주립대 식의 상향평준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쓸 수 있는 정책 많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교육학)는 “지방으로 이전하는 170여 공공기관에서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지역대학 출신 쿼터를 두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학부 입학을 어디로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종 학력이 어딘지가 중요하게 평가 받을 수 있도록 대학, 기업, 정부 간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체제개편 등을 포함해 시도할 수 있는 정책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장혜옥 학벌없는사회 대표는 “10여년의 연구 성과가 이어져오면서 여러 정책 등 해법이 제시됐지만 문제는 이를 실행할 의지”라며 “진정으로 아이들의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을 하고 싶다면 아이들이 사교육의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하는 입시경쟁에서 벗어나도록 정책을 실현할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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