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ㆍ12사태는 1979년 12월 전두환 노태우 소장 등의 신군부가 군 공식 지휘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일컫는다. 어제가 바로 그 사건 35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규하 대통령 재가를 미처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해사건과 관련 있다며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신군부와 군 공식지휘를 받는 부대들간 대규모 충돌 직전 상황까지 갔다. 결국 승리는 군 통신과 정보를 장악한 신군부에게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위력을 발휘했다.
▦ 하룻밤에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큰 사건이었지만 이제 관련 당사자들도 상당수 세상을 떠났고, 세인들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하다. 세월의 망각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전인 1973년에 일어났던 ‘윤필용 사건’이 갑자기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유신시절인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소장과 육군장교 13명이 쿠데타 모의 혐의에 연루됐던 사건이다. 이 사건을 현재 진행형 권력암투의 무대로 호명한 사람은 청와대가‘정윤회 문건’의 작성ㆍ유출 핵심으로 지목하는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다.
▦ 윤필용은 유신정권 초기인 당시 이후락(정보부장), 박종규(경호실장), 강창성(보안사령관)과 함께 권력의 핵심 축을 이루면서 서로 견제하는 관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들을 교묘하게 경쟁시키며 유신체제 공고화를 꾀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윤필용이 이후락과 가까워지며 사달이 났다. 그가 사석에서 “각하가 노쇠했으니 형님(이후락)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이 ‘각하’의 귀에 들어갔다. 쿠데타 모의에 대한 보안사령부의 대대적 수사가 벌어졌다.
▦ 그러나 쿠데타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윤필용은 횡령 수뢰 군무이탈죄 등으로 15년형을 받았고 그와 가까운 장교 다수가 군복을 벗었다. 윤필용 사후 그의 아들이 청구한 재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났다. 박정희가 권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해 윤필용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태를 키웠다는 해석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 조 전 비서관은 ‘박근혜 대통령 부하(문고리 3인방)들’과 정윤회씨를 거명하며 “유신시대 윤필용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부도덕하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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