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기업인 가석방의 ‘경제 살리기’ 효과 근거를 제시하라.”
경제정의실천연합은 26일 ‘정부 여당은 원칙 없는 재벌총수 사면, 가석방 여론 조성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서에서 이 같이 주장했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여의도 국회와 세종시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기업인 가석방을 위한 군불을 떼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인데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강한 어조로 기업인 가석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아예 다음주에는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 논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내세운 가석방 필요성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경제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경기 활성화를 위해 기업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고 이는 총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 또 하나는 기업인이라고 해서 법 집행에 있어서 일반인과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업이 투자를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오너 총수가 없기 때문일까 하는 물음표를 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기를 예측하기 힘들고, 투자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지, 오너가 없어서 할 투자를 못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인데요.
경실련도 사면ㆍ가석방에 따른 경제 활성화의 객관적 근거를 국민들에게 먼저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재벌 총수들의 구속과 사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총수들에 대한 법 집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경실련의 주장입니다.
역대 정권들은 경제위기 때마다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으로 기업인에게 사면의 '선물'을 안겨왔는데, 김대중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만 해도 특별 사면이 29차례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통해 45명의 기업인들이 사면됐고, 2009년에도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를 받은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4개월 만의 특별사면이 있었습니다.
경제개혁연대를 이끌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설사 오너가 풀려 나온 뒤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다 해도 그것 역시 정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주주 이익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을 내보내준 정치권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투자를 하는 것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우리 대기업의 경영 시스템을 과거로 후퇴 시키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기업인이라고 법으로부터 역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 점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기업인도 당연히 ‘만인’의 한 사람은 맞지만, 국민 여론이 대기업 오너가 차별 받고 있다거나 억울할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오히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황’ 사건을 접하고 들끓은 여론에서 보듯 대기업 총수를 포함해 그 가족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바라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구속된 비리 기업인들은 배임ㆍ횡령ㆍ주가 조작 등 공정한 경제 질서를 훼손하고, 국내 경제를 어지럽혀 우리 경제 시장의 신뢰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평등한 법 집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부ㆍ여당이 쉽게 살아나지 못하는 경기를 활성화 하기 위해 대기업 총수를 포함한 기업인 사면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치권은 가석방 카드를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기업에게 베푼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기업이 투자를 하도록 할 게 아니라 분명한 사업 계획과 예측에 근거를 둔 투자가 이뤄져야 나중에 ‘탈’이 날 가능성도 줄어들겠죠.
대신 기업인의 가석방과 사면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정해 그걸 기업에게 전달하고, 기업들이 거기에 맞춰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어려운 숙제”라며 “정치권에서 사면이나 가석방 카드를 여론 눈치 보며 만지작만지작 했다 말았다 할 것이 아니라 되든 안되든 그 실현 여부를 미리 못박아 준다면 오히려 도움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정치권의 가석방 논의로 가장 난처한 것이 SK그룹입니다. 이번 논의가 현실화 할 경우 대표적 사례가 될 대상이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 회장의 동생 최재원 부회장이기 때문인데요. SK그룹은 그 동안 최 회장 형제의 가석방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많을 애를 써왔습니다.
지난 9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 불법 수익을 모두 환원하는 등 가석방 요건을 충족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에 공헌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다면 기회를 줄 수 있다”며 가석방 가능성을 처음 공식적으로 내비치자 재계 안팎에서는 가석방 조건을 채운 최 회장 형제가 그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SK그룹 내부에서도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때마침 정부가 그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공을 들여 온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진행 속도가 더디자, 주요 대기업들로 하여금 지역을 나눠 해당 지방자치단체들과 손잡고 센터 설립 및 사업을 진행하도록 방향을 잡았는데요. SK그룹이 대전과 세종시 등에서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최 회장 형제의 가석방을 위한 분위기 조성이라는 맥락에서 비롯했다는 얘기가 재계에서 많이 나왔죠.
그러나 SK의 기대와 달리 가석방 얘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쏙 들어갔고, 혹시나 대통령의 '성탄 특사'가 있어왔던 연말, 연초에 다시 나오려나 맘을 졸이던 중에 ‘땅콩 회황’이라는 대형 변수가 터지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의도와 세종시의 정부 여당 내 실력자들이 가석방 카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SK그릅은 접었던 기대를 다시 하게 됐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티를 낼 수 없으니 속만 타고 있습니다.
SK그룹 관계자는 이날 “삼성그룹의 4개 계열사 인수를 통해 ‘빅딜’을 성사시켰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처럼 큰 그림을 그리고 굵직한 규모의 투자를 위해서는 (최태원 회장의) 복귀가 필요하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SK그룹이 바라는 것은 분명 최 회장 형제가 석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 바람대로 가석방이 된다 한들 조현아 부사장 사태 이후 나빠진 대기업을 대하는 여론 때문에 SK그룹과 최 회장 형제의 이미지에 되려 나빠지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걱정도 있구요. 또 하나 가석방의 대표적 수혜 기업으로 알려질 경우 정부 여당은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적지 않은 추가 투자를 해야 할 상황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 상황까지 내다보고 이미 결정했어야 할 투자를 내부적으로 '연기' 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