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쓰리 라이브’라니 제목치고는 너무 덤덤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콘텐츠의 뜨거운 충돌이 숨어 있었다. 열정(passion)은 말로의 보컬을, 우아(grace)는 전제덕의 하모니카를, 화염(fire)은 박주원의 기타를 각각 상징하는 삼원색 포스터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비의 관객 위로 내려 앉고 있었다.
26일부터 28일까지 펼쳐진 공연은 여러 시청각 이미지가 어우러져 빚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짐짓 덤덤하게 추보식으로 그 현장을 따라가 본다.
무대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감미로운 보사노바 ‘딘디’로 시작했다. 한겨울에 듣는 보사노바라니. 스탠 게츠의 라이브 명반 ‘게츠 아우 고고’가 코 앞에서 재현되는 듯한 감동을 재현하고 싶었다면 무대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재즈의 구루(Guru) 콜트레인이 선법재즈(Modal jazz)의 이상으로 실현했던 ‘마이 페이버리트 씽스’가 라틴음악의 열정으로 부활하면서 장내 온도가 높아갔다. 단조와 장조를 마음대로 오가는 무봉(無縫)의 연주, 하늘로 올라간 말로의 스캣은 ‘꽃잎 지네’에서도 확인됐다. “오늘 공연은 이상하게 가슴이 떨리고 기분도 상승되네요.” 말로의 말이다.
그 상승이 부질없는 열광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어진 ‘제자리로’가 말해 주었다. 신보 ‘겨울 그리고 봄’에 수록된 ‘제자리로’의 가사 일부는 이렇다. “깨우지 마라 저 포근한 집들의 밤을 / 흔들지 마라 저 아늑한 꿈들의 밤을.”
세월호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평정을 유지했던 어린 학생들을 기억하는 노래다. 아이들을 놓아 보낸 항구의 스산한 풍경과 흩날리는 꽃잎이 스크린에 투영됐다. 트럼펫은 위령의 선율로 가세했다. “길 잃은 아이 이제 제자리로 / 떠났던 사람 다시 제자리로”라는 3절은 객석이 나지막이 합창하면서 불렀다. 공연장이 아니라 무참히 떠나 보낸 것들에 대한 하나의 제의였다.
그러나 ‘너에게로 간다’에서는 라틴 리듬으로 반전을 이루었다. 끝없이 달리는 기차 맨 앞에서 잡은 동영상이 무대 전면의 스크린에 펼쳐졌고 그 순간 드럼이 리듬의 향연을 연출했다. 격렬한 삼바 리듬의 드럼 솔로가 마침내 객석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1960년대를 풍미한 백인 여성 재즈 가수 아니타 오데이가 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로는 아예 뛰어다니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한 줄짜리 베트남 민속악기 단보우의 신비한 소리를 목으로 내며 말로는 특별한 스캣 창법으로 객석을 맞았다.
이어 박주원이 기타 솔로 ‘밀크셰이크’를 들려주었다. 플라멩코 기타의 전설인 파코 데 루치아가 울고 갈 정도의 현란한 라틴 기타였다. 스크린의 만화경 같은 이미지 동영상이 객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박주원은 마이크를 잡더니 “여러분의 가슴에 불을 지르려 3집에 나오는 곡을 연주했다”며 다시 ‘카발’을 선보였다. 박지성 선수를 위한 곡 ‘캡틴 No7’은 박지성의 드리블보다 더 화려한 음을 분사했다. 그의 기타는 어쿠스틱 악기가 사이버 시대에도 왜 당당히 존재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속주의 끝이라 해도, 절륜의 경지라 해도 좋다. 그것은 단순히 기교를 넘어 소리의 질감, 잊고 있던 가치에 관한 문제다.
전제덕은 알려진 라틴 음악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장조와 단조를 넘나드는 연주로 구현했다. 새 순이 움트는 영상을 배경으로 펼쳐진 ‘봄의 왈츠’는 그가 자신의 무대 제목인 ‘우아(grace)’와 왜 한 묶음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흥겨운 보사노바 ‘댄싱 버드’에서 그는 추임새 같은 괴성을 질렀다. 드럼 세트와 타악 세트가 현란하게 메기고 받으면서 판에 끼어들었다.
이 날 무대는 세 뮤지션이 이제껏 펼쳤던 풍경과 조금 달랐다. 그것은 이들의 예술이 사회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대의 저변에 정부의 통합문화이용권 사업과 서울문화재단의 예술로희망드림 사업이 깔려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술가를 꿈꾸는 청소년 420여명이 초청돼 있었던 것이다. 예술로희망드림 사업을 통해 발굴된 음악 꿈나무 우용기(피아노)도 무대에 올라 감동을 선사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 1악장’의 능란한 분산 화음이 극장 가득 감흥을 채우며 신성의 출현을 알렸다.
이에 운을 맞추듯 전제덕이 하모니카로 구사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선율은 리릭 소프라노에 필적했다. 전제덕의 하모니카는 삼바의 열정에서 북구의 우수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의 기세로 구현하는 ‘마술피리’였다. 모차르트가 동명의 오페라를 구상했을 때 저 정도의 소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무대의 압권을 꼽으라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펼친 시간이었다. “제덕씨가 저의 ‘벗꽃 지다’를, 저는 주원씨의 ‘슬픔의 피에스타’를 연주하겠어요.” 말로의 이 말은 한국에 재즈라는 상징어 아래 단단히 결합된 커뮤니티가 탄생했다는 선언이었다. 목소리, 하모니카, 기타가 서로의 몸을 빌어 빙의라도 하듯, 세 사람의 드나듦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그 무엇을 주장하고 있었다. ‘바람’ 같은 곡에서는 하모니카와 기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복잡한 멜로디를 연주했다. 마치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펼쳐 보였던 제창(unison)처럼. 그러면서 각자의 자유는 존중됐다. 뉴올리언스 재즈의 집단 즉흥이 저러지 않았을까.
이 지점에서 ‘이주엽 사단’의 탄생을 말하고 싶다. 이처럼 예술성과 대중성이 결합해 미래의 열린 형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기저에는 이주엽이 기울인 분투의 시간이 두텁게 퇴적돼 있다. 그는 세 사람, 나아가 참신한 재즈의 여러 힘을 결집하고 재조직했으며 뛰어난 작사가로 모든 곡에 언어의 날개를 달아준 주인공이다.
객석은, 공연 후 하모니카를 집어 넣은 전제덕의 노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노래 솜씨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는 스티비 원더의 ‘이즌트 쉬 러블리?’를 원더보다 더 원더처럼 불러 기대에 부응했다. 세 사람의 변신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객석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더 쓰리 라이브' 예고 영상
제주CBS 주최 'Jazz in Jeju 2014'에서 세 사람의 공연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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