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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지록위마(謂鹿爲馬)

입력
2014.12.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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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사(李斯)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순자(荀子)의 제자로서 진(秦)나라 승상 여불위(呂不韋)에게 발탁되어 진시황에게 축객령(逐客令)을 중지하도록 간했다. 전국시대에는 출신국을 따지지 않고 능력만 있으면 등용했는데 유독 진나라 출신들은 기득권 수호 차원에서 다른 나라 출신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축객령을 주창했던 것이었다. 이사는 “태산은 모든 흙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 수 있었고, 황하와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깊을 수 있었습니다(太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사기-이사 열전)”라 간했고 진나라는 출신 배경을 따지지 않는 인재 영입책으로 중원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승상(丞相)까지 오른 이사는 그만 권력에 눈이 멀어 제위(帝位) 계승문제에 잘못 개입했다. 환관 조고(趙高)와 짜고 진시황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맏아들 부소(扶蘇) 대신 막내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북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있던 부소와 장군 몽염(蒙恬)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2세 황제 3년(서기전 207)년 승상이 된 조고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이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무렵 여러 제후들이 연합해 진나라에 도전했다. 진나라 장수 장함(章邯)이 맞서 싸우다가 패전 한 후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조고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사마흔이 돌아와서, “조고가 궁중의 일을 다 보고 있으니 장군은 공이 있어도 죽을 것이고, 공이 없어도 죽을 것입니다(사기-진시황 열전)”라고 말했다. 두려워진 장함은 제후들에게 항복했고 옹왕(雍王)으로 추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고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먼저 시험해보기로 했다. 조고가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것은 말 입니다”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웃으면서 “승상이 잘못 알고 있군. 사슴을 일러 말이라고 하다니(謂鹿爲馬)”라고 했다. 좌우에게 물으니 어떤 이들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말이라고 말하면서 조고에게 아부했고,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다. ‘사기-진시황 본기’는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은 몰래 법으로 처단했다. 이후 모든 신하들이 다 조고를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기는 ‘사슴을 일러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위록위마(謂鹿爲馬)’라고 썼지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기록했다. ‘정원의 사슴을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원록화마(苑鹿化馬)라고도 하는데 사슴을 말이라고 속였던 조고도 뒤끝이 좋지는 못했다. 2세 황제를 압박해 자살하게 한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子?)을 옹립했으나 도리어 자영에게 삼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영도 곧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14년 만에 멸망했다. 게다가 자영도 항우(項羽)에게 잡혀 죽고 말았으니 지록위마를 방치한 대가가 망국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임금을 속여서 높은 벼슬을 취하는 것을 ‘지조위란(指鳥爲鸞)’이라고 한다. 야조(野鳥), 즉 들의 새를 난(鸞)이라고 속여서 높은 벼슬을 취했다는 뜻으로서 ‘휘원(彙苑)’에 나오는 일화이다.

임금이 우매해서 패망에 이르는 것을 ‘백치(白雉ㆍ흰 꿩), 흑치(黑雉ㆍ검은 꿩)’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서(漢書)-평제(平帝) 본기’에 따르면 전한(前漢)의 마지막 임금인 평제 원시(元始) 원년(元年ㆍ서기 1년) 정월에 남방 나라인 월상씨(越裳氏)에서 백치와 흑치를 한 쌍씩 바쳤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의 덕을 주공(周公)에 비교하면서 ‘안한공(安漢公)’으로 봉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주나라 성왕 때 주공(周公)이 섭정하자 월상국에서 흰 꿩을 바쳤던 사실을 본뜬 것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성제 때의 꿩 헌납 사건은 왕망의 조작이라고 보았다.

조선 세종 10년(1428) 10월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이 종묘를 공경하면 흰 까마귀(白烏)가 이른다’고 했는데, 지금 흰 꿩이 나타나 상서로움을 드러냈으니 진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칭하하게 하소서(‘세종실록’ 10년, 10월 7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세종이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아첨에 응하지 않는 이런 처신에 있었다.

‘교수신문’이 꼽은 2014년의 사자성어가 ‘지록위마’라고 한다. 금년의 국정난맥상을 잘 표현한 성어인데 내년에도 사슴을 사슴이라고 하는 지록위록(指鹿爲鹿)의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것 같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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