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방법원 제14형사부는 17일 자신의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강제추행)로 만화가 정모(43)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정씨는 항소했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한국만화가협회는 정씨를 제명했고 네이버는 연재 중단 상태였던 그의 작품 자체를 웹툰 페이지에서 제거했다. 팬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됐다.
정씨는 만화가로 활동한 지 18년째로, 약초를 소재로 한 웹툰을 그려 2013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만화부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인기 작가였다. 섬세한 그림체로 인정받아 2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신인 웹툰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화가를 위한 저작권 지침서'를 그렸으며 한국만화가협회의 이사로 선출된 명망 높은 작가였다. 그런 그였기에 팬들의 충격과 배신감은 더 크다.
정씨 한 사람만의 문제일까. 교육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만화가가 문하생이나 어시스턴트를 하수인 부리듯 하면서 정당한 보수와 대우를 해주지 않은 것은 암묵적으로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만화가와 어시스턴트 사이 다툼이 일어난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 화실을 운영중인 박모(43) 작가는 9월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예전 어시스턴트들과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어시스턴트들은 약속보다 적은 임금과 과중한 노동, 비인간적 대우를 이유로 박 작가의 화실을 그만두었다고 주장했다.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 만화계를 다루는 칼럼을 기고 중인 만화평론가 성상민씨는 두 사건을 두고 “만화가들은 문하생이나 어시스턴트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만화가들 역시 낮은 원고료에 매여 있는 상황이라 스스로가 어시스턴트와의 관계에서는 고용자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들어 개선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웹툰 중심으로 만화계가 재편되고 전문교육시설이 늘어나면서 문하생 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만화가들은 어시스턴트의 이름을 작품에 명기하고 계약서를 쓰는 등 조력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직까지도 화실 내 권력관계를 악용하는 관습이 남아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 만화계를 이끌겠다는 책임감이 강한 것으로 보였던 정씨마저 화실에서 문하생을 대우하는 방식이 전근대적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의 김상철 정책위원은 어시스턴트와 문하생의 지위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시스턴트나 문하생은 스스로 작품을 이끌지 못할 뿐 작품에 기여하고 있지만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나아가 “만화가-어시스턴트 관계뿐 아니라 만화가와 웹툰을 게재하는 주요 포털 등 연재처와의 계약 관계도 불투명하다”며 만화산업 전반의 계약관계 표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작업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화계의 적극적인 태도다. 한국만화가협회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지 오래됐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화실 내 문하생이나 어시스턴트 처우 문제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개입하기 이전에 만화계가 자발적인 개선안 마련에 힘써야 만화가들의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어시스턴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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