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지멘스 테크놀로지 센터
기존 車 수천개 시스템 대체하는 '심장' 역할 새 컨트롤러 도입
독일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 받아 대학·기업·연구소 기술 공유해 개발
지난달 초 독일에서 신개념의 시스템 기술을 적용한 노란색 ‘전기 트럭’이 완성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배달용 트럭으로 쓰일 예정인 이 전기차는 갖가지 전자제어장치, 통신시스템, 소프트웨어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차량 내부 시스템을 간단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 다이어트’를 실현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전기차 전문 회사 ‘스트리트스쿠터(Streetscooter)’가 만든 전기차에 2012년 독일 지멘스, 슈투트가르트대, 프라운호퍼 연구소 등이 손잡고 시작한 ‘레이스(RACE, Robust and Reliant Automotive Computing Environment for Future eCars) 프로젝트’ 팀이 개발한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지난달 중순 찾은 독일 뮌헨의 ‘지멘스 테크놀로지 센터’에서 만난 귄터 프라이탁 책임연구원은 “자동차에 더 많은 정보통신기술(ICT)이 더해지면서 자동차 내부 구조가 복잡해 지고 있다”며 “중형차의 경우 70여가지 서로 다른 시스템이 얽혀 있고 각종 보조 장치와 데이터 장치까지 감안하면 수천 개 시스템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거미줄처럼 얽힌 기존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할 새 시스템을 완성해 가고 있다”고 밝혔다.
프라이탁씨는 기존 자동차 시스템과 새 시스템의 차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을 보여줬다. 현재 대부분 자동차 내부는 수십가지 선이 꼬여있어 복잡해 보이는 반면 레이스 시스템이 적용된 내부 구조는 10개 남짓의 컨트롤 박스와 선 몇 개로만 이뤄져 있어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프라이탁 연구원은 “센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방향 속도 제어 장치 등을 ‘심장’ 역할을 하는 컨트롤 장치의 통제를 받는 소프트웨어로 연결해 자동차의 모든 요소들이 움직이게 한다”며 “소프트웨어가 중심이기 때문에 설치나 적용도 간편해졌다”고 설명했다. 마치 개인용 컴퓨터(PC)에 USB로 연결하면 기기가 알아서 작동하는 것처럼 접속만으로도 움직이는 ‘플러그 인 플레이(Plug-in-Play)’ 방식으로 구동 한다. 또 전자제품들이 소프트웨어만 업그레이드하면 새 제품처럼 쓸 수 있듯 이 시스템 역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내려 받는 식으로 소프트웨어만 바꾸면 주차보조시스템, 차선유지보조시스템 등 기능들이 향상된 버전으로 적용된다.
이 곳 연구실과 실험실도 몇 가지 테스트 기기와 측정 기기만 놓여있어 단출했다. 프라이탁 연구원은 “기존에는 각 파트 마다 성능 테스트를 따로 했지만 새 시스템은 여러 실험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며 “다양한 도로 환경을 입력하고 시뮬레이션 운전을 하면서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집중적으로 살피는 동시에 안전상 문제가 없는지도 치밀하게 따져본다”고 설명했다. 시스템이 복잡할수록 에너지가 그 만큼 더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레이스 프로젝트가 일반화되면 에너지 사용량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란 전기 트럭을 완성하기 위해 스트리트스쿠터측과 지멘스 등 레이스 프로젝트 팀이 뭉친 것은 지난해 7월. 5개월 만에 전혀 새로운 시스템의 차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신차 개발에 최소 4,5년 걸리는 자동차 업계의 상황을 감안하면 획기적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전기트럭이 만들어지기까지 유명 자동차 메이커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라이탁 연구원은 “레이스 프로젝트는 독일 연방정부 경제ㆍ에너지부로부터 2,000만 유로(약 255억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회사가 참여하지 않은 자동차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에 독일 정부는 거액을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 정부의 이런 투자는 미래 자동차 시장에서는 기존 자동차 메이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연구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전기차를 제공한 스트리트스쿠터도 2009년 독일 아헨공대 아킴 캠프커 교수 주도로 80개 넘는 유럽 내 정보통신기술(ICT), 시스템, 소프트웨어 관련 대학과 기업들이 함께 만든 회사로 ‘순수 전기만을 이용한 다양한 이동수단’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참여 기업과 연구소가 각자가 잘하는 기술을 내놓고 공유하는 ‘오픈소스 크라우드 소싱’ 방식을 활용해 2012년 6,000달러(약 700만원) 남짓의 저렴한 도심형 전기차를 내놓아 세계적 물류회사 DHL에서 3,500대 주문을 받을 만큼 성공을 거뒀다.
지멘스와 스트리트스쿠터는 공동으로 기존 모듈 중심의 자동차의 틀을 전자전기 시스템을 위한 전용 틀(ICTEE)로 바꾸는 ‘오스카(Oscar)’ 라는 또 다른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대형 자동차 회사는 참여하지 않는다.
미래 자동차 개발은 이처럼 대형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모든 연관 산업들이 뛰어들면서 그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은 자동차 부품 중 전기전자장치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기차와 자율주행자동차의 상용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2030년에는 전장 부품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연스럽게 자동차 산업의 무게 중심도 기계 기술 기반의 기존 자동차 메이커와 부품 회사들에서 각종 시스템, 소프트웨어, 전장 부품과 관련 회사와 연구 기관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김범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기존 자동차 메이커, 부품회사들이 시스템, 전장 관련 회사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 하거나 기술 제휴 등 합종연횡을 진행 중”이라며 “업종의 벽을 깨고 적극적으로 R&D에 나서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밝혔다.
뮌헨=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영상] '스트리트스쿠터'의 전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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